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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세월 버텨낸 위대한 삶에 대한 헌사(‘폭싹 속았수다’)이주의 드라마 2025. 3. 11. 09:34728x90
‘폭싹 속았수다’, 고되지만 위대한 모든 삶에 전하는 위로
폭싹 속았수다 “무쇠도 닳네. 닳아.” 손 꼭잡고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가며 애순(문소리)은 절뚝거리는 관식(박해준)에게 말한다. 애순의 말처럼 어려서는 무쇠 소리 듣던 관식이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 몸이 세월에 장사 있을까. 게다가 열 살부터 지게를 지며 살았던 관식의 삶이라면 무쇠라도 당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특히 애순을 위해서라면 어려서부터 따라다니며 몸이 부서져라 일해왔던 관식이었다. 그럼에도 관식은 걱정말라며 애순보다 더 오래 살거라 말한다. 두고가는 것보다 잘 보내고 따라가는 게 마음이 편해서란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무쇠 같던 관식의 몸처럼 한 때는 힘이 넘치는 봄날이었던 청춘이 모진 세월을 겪으며 닳고 닳아 이제 삐거덕 거리며 걸어가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다. 물론 제주에서 나고 자라 그 고단함이 훨씬 더 컸던 애순과 관식이지만, 이런 삶은 누구나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일 게다. 왜 나이 들면 몸이 아프겠나. 그저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재게도 움직였던 삶이 아픈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쓸쓸하고 힘들며, 때론 억울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옆에 손 꼭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풍진 삶도 살아진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려 한다.
우리네 삶 전체를 이야기하려 했기 때문일까. <폭삭 속았수다>는 봄여름가을겨울로 흘러가는 사계의 흐름에 빗대 삶을 풀어내려 한다. 넷플릭스답지 않게 4주에 걸쳐 4회씩 공개되는 방식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테다. 하지만 이렇게 나눠 놓은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한 번에 16회를 다 꺼내놓기 아까운 작품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한 주에 4회도 너무 많게 느껴진다. 기다리기 싫고 몰아서 다 보고픈 마음이 큰 시청자들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엉뚱하다 싶겠지만, 적어도 <폭삭 속았수다>는 한 회 한 회 천천히 오래도록 음미하면서 보고싶은 작품이다. 그저 꿀떡 삼키기보다는 씹을수록 우러나는 맛이 느껴지고,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거워지는 작품이다.
1회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염혜란과 아역배우 김태연이 말그대로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 이 첫 회는 토속적인 제주 방언을 기막히게 살려낸 대사 속에 제주 해녀들의 고된 삶이, 애순(김태연)과 애순 엄마 광례(염혜란)의 절절한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자식들만큼은 이 험한 물질 안시키기 위해 허구헌날 점복 잡으러 무리하는 광례의 삶은 소설 한 권을 써도 될 정도로 신산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게꾼 팔자란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는 빚잔치에 무너졌고, 첫 서방은 병수발을 하다 먼저 보냈으며, 새 서방은 하는 일 없는 한량이다. 모두가 그 지게에 올라타려고만 한다.
그런데 허구헌날 점복 잡으러 물질 하는 엄마에게 툴툴대며 “이럴라면 점복을 낳지 나를 왜 낳았대”라고 말하면서도 엄마 걱정이 한 가득인 딸 애순만은 다르다. “전부 다 내 지게 위에만 올라타는데 이 콩만한 게 자꾸 내 지게에서 내려와. 자꾸 지가 내 등짐을 같이 들겠대.” 광례의 말처럼 애순은 엄마가 좋고 엄마가 힘들게 물질하는게 눈에 밟혀 ‘점복 팔아 버는 백환’을 대신 자기가 주고 엄마의 하루를 사고 싶다는 시를 쓴다. 먹고 살기 힘들데 무슨 놈의 시냐던 엄마는 그 시를 읽고는 그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왜 아닐까. 자기 힘든 걸 알아주는 자식이니 말이다.
애순과 광례의 끈끈한 모녀관계가 보여주는 건 숨막히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서로 기대고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어 그 모진 삶도 살아진다는 것이다. 그건 애순과 어려서부터 그녀를 따라다녔던 관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죽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던 애순이 아픔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건 엄마의 말처럼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 살아야할 삶이 밀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옆에 소처럼 묵묵히 애순을 지지해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바로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복어처럼 독하게 숨이 턱턱 막혀올 때까지 물질을 하고 쇠도끼처럼 밭을 갈아 생계를 꾸려오다 겨우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버린 광례지만 “넌 요런 딸내미 있어?”라고 자랑하던 봄날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어려서 아빠를 여의고 엄마마저 잃은 채 작은아버지 집과 엄마 집을 오가며 ‘식모살이’를 하면서 문학의 꿈도 저버릴 수밖에 없던 애순(아이유)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관식(박보검)과 결혼해 가진 아기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여겼던 봄날이 있었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그 의미처럼 이 드라마는 세상의 모든 닮아버린 고단한 삶에 대해 수고하셨다고 보내는 헌사다. 때론 누군가를 먼저 보내야 하는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가 있어 우리의 삶을 살아질 수 있었다. 그 저마다의 위대함 앞에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호로록 지나버리는 봄날을 거쳐 꽈랑꽈랑(햇볕이 쨍쨍)한 여름과 그 후의 가을, 겨울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참으로 오랜만에, 기다리는 게 즐거울 정도로.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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