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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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문근영은 신윤복이다

D.H.Jung 2008. 10.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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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버리자 여성이 된 문근영, 그리고 신윤복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를 얻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귀엽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미소, 특유의 선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를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또한 족쇄이기도 했다. ‘어린 신부(2004)’, ‘댄서의 순정(2005)’으로 구축된 여동생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는 한편, 모 이동통신사의 CF를 통해 섹시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이미지로 두고 싶어했다.

2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문근영에게 다가온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남장여자란 그녀가 강요받아온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와, 또 변신해야할 성인연기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난 제3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우리네 연예계에서 여성연기자들에게 강요되는 두 이미지, 즉 귀엽거나 섹시한 그 이미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녀가 여성의 이미지를 버리자 오히려 여성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화동(畵童)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문근영이라는 국민여동생이라 불리던 연기자에게 가장 편안한 옷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은 신윤복의 겉모습인 화동의 이미지를 깨고 바깥으로 슬쩍슬쩍 빠져나온다. 스승인 김홍도(박신양)의 등에 업혀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그림을 가르쳐주기 위해 잡은 김홍도의 손길에 마음이 떨리기도 한다.

이러한 ‘강요된 남성성, 드러내고 싶은 여성성’은 문근영이라는 연기자가 꿈꾸던 것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이미지보다는 아이의 이미지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대중들의 욕망과 그 속에서 본인 스스로 보여주고픈 여성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상황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이 그림 속에서 여성성에 끌리는 것(여성을 주로 그리고 화풍 또한 여성성을 따른다)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도 연결된다. 신윤복은 그려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당대의 틀을 깼던 화원이다.

극중 신윤복이 정향(문채원)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성을 더 강조한다. 신윤복은 금기된 것, 즉 여성성에 대한 희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한다. 신윤복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림에 담으려 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그녀는 정향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음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채워 넣으려 하는 것이다. 그녀가 ‘단오풍정’의 그림을 펼쳐놓고 정향에게 “이 그림 속에 들어와 주시요”하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보면 문근영이란 연기자와 신윤복이라는 캐릭터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문근영은 연기자로서 강요된 이미지와 드러내고픈 이미지를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문근영이라는 연기자의 훌륭한 옷이 되어주고 있다. 신윤복을 통해 보여준 문근영의 이미지 변신은 또한 우리네 여성 연기자들이 가진 딜레마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연기자로서 강요되는 이미지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문근영은 신윤복을 통해 그걸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