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꿈이 아니거나(非夢), 슬픈 꿈이거나(悲夢)

728x90

‘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