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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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폭발력은 어디서 오나

D.H.Jung 2009. 6. 1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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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사극의 정점을 보여주는 ‘선덕여왕’

“생(生)을 고르면 살고 사(死)를 고르면 모두 죽는다.” 금지시킨 차 교역을 한 죄로 끌려온 덕만(남지현)은, 자신과 일행들의 목숨을 건 제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이미 어느 돌이든 모두 사(死)임을 알고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 수수께끼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순간, 덕만이 자신이 선택한 돌을 꿀꺽 삼켜버리고 제후의 나머지 돌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으로 미션을 해결한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면서 어떤 문제를 풀었을 때 갖게 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이로써 덕만의 레벨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이것은 기본적인 '선덕여왕'의 '미션제시-해결'의 이야기 구조. 이 미션사극을 움직이는 강력한 주동력이다.

이중으로 겹쳐져 있는 위기의 미션
일종의 미션을 제시하는 것이 '선덕여왕'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미션 속에 제시되는 주인공의 위기는 여타의 사극보다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특징을 가진다. 사막까지 쫓아온 자객을 피해 달아나는 미션에서도, 또 우여곡절 끝에 만난 덕만과 천명(신세경)이 설지(정호근)와 그 무리들에게 붙잡혀 팔려갈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미션에서도, 또 겨우 도망쳐 나와 절벽에서 천명의 손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살아나오는 미션에서도 이러한 위기는 또 다른 위기와 겹쳐진다.

발을 잘못 디뎌 유사(모래수렁)에 빠져버린 양어머니 소화(서영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덕만은 마침 나타난 자객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비를 내려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설지의 마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될 즈음, 미실이 파견한 토벌군에게 쫓기게 된다. 절벽에서 덕만과 천명이 서로의 생명줄을 잡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도 토벌군의 추격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늘 해법은 제시된다. 때 아닌 모래폭풍이 덮치고, 안오던 비가 내리고, 늘 도움만 받아왔던 천명이 오히려 덕만을 구해낸다.

해결책은 의외로 싱겁지만, 그것은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이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위기가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다는 것, 그것이 사극의 힘을 만드는 진짜 힘이 된다. 이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미션사극의 핵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사극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 결말이 뻔한 사극에 빠져드느냐고?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결과에 이르는가, 그것이 미션사극이 제시하는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볼 수 있다.

미션사극이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할 기본 전제
'선덕여왕'의 초반부를 끌어가는 힘을 미실(고현정)이라는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악역에 둔 것 역시 이 사극의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션사극은 도달해야할 지점이 현재 주인공이 있는 지점에서 멀면 멀수록 더 힘을 발하기 마련이다. 도달해야할 지점인 권력의 정점에 미실을 세워두고 신라도 아닌 중국 이역 땅에 덕만을 배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먼 곳에서부터 점점 중심으로 다가가는 덕만이 해나가는 미션들은 그 거리만큼 더 폭발력을 갖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덕만이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미션들이 가진 단순함이다. 미션사극은 우리식 사극에 저 미드가 가진 스토리 전개를 접목한 것. 하지만 50부작에 이르는 우리네 사극이 저 미드만큼 꽉 짜여진 미션들을 갖고 있다면 이처럼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미션들은 물론 뒤따르는 미션과의 연결고리를 갖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만큼 얼개를 느슨하게 가져감으로써 시청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 '돌 뽑기 미션'이나 '사막 추격 탈출 미션'은 연결점 없이 각각의 것으로 존재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미션들을 해결함으로써 어떤 성장의 과정을 그려내는 덕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따라서 좀 더 편안하게 각각의 미션을 즐기는 것으로 사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것은 '대장금'에서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김영현 작가표 사극의 파괴력이다.

‘선덕여왕’, 미션사극의 새로운 정점
미션사극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이병훈 PD의 필모그래피에서 미션사극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조망해볼 수 있다. 99년도에 방영되었던 ‘허준’과 2001년도 방영된 ‘상도’는 미션사극이 가진 가능성을 촉발시켰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최완규 작가일 것이다. 최완규 작가가 이병훈 PD와 함께 ‘허준’, ‘상도’를 통해 우리식 사극에 미드 식 전개를 붙여 미션사극의 바탕을 만들었다면, ‘대장금’에 이르러 그 바톤을 이어받은 후배 작가 김영현은 여기에 여성적인 색채를 가미하면서 사극의 시청층 자체를 넓혀놓았다.

‘선덕여왕’은 김영현 작가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능수능란한 여성이 주인공인 미션사극이다. 따라서 현재 미션사극의 정점으로서 ‘선덕여왕’이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사극의 성공에 작가의 공만이 있을까. 미션 사극에 있어서는 그것을 연기해내는 연기자들의 몫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양 극점에 선 인물들이다. 미션을 제시하는 자와 그 미션을 수행하는 자가 균형 잡힌 대립각을 이룰 때, 미션사극의 힘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과 덕만을 연기해온 남지현의 호연은 바로 그 대본이 가진 힘을 배가시켰다.

올해 사극이 새롭게 꺼낸 ‘여걸’이라는 카드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나 ‘자명고’가 거둔 성과가 미미한 반면, ‘선덕여왕’이 단 몇 회만에 폭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미션사극이라는 흥미로운 대본의 공이 크다. 이제 막 초반을 달리고 있는 ‘선덕여왕’은 아직도 그 파괴력의 끝을 알기가 어렵다. ‘주몽’은 한때 월화의 밤을 장악한 이래, 한동안 동시간대 타방송사의 드라마들이 맥을 추지 못하게 했다. 탄력을 받은 사극을 현대극으로 맞받아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산’이 등장했을 때 SBS는 ‘왕과 나’로 맞불을 놓았었다. 하지만 ‘자명고’가 사극으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선덕여왕’의 독주는 막을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선덕여왕’의 폭발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