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아버지를 닮은 드라마, '아버지, 당신의 자리'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아버지를 닮은 드라마, '아버지, 당신의 자리'

D.H.Jung 2009. 10. 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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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당신의 자리', 낡은 역을 닮아버린 아버지

우리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청소(靑所)역. 푸른 곳이라는 뜻이 무색할 정도로 낡은 간이역. 낡은 기차가 들어오는 그 낡은 역에는 그 역과 함께 나이 들어 낡아버린 아버지 이성복(이순재)이 있다. 어느새 자식들에게 짐짝 취급을 받게 된 그는 역 벤치에 앉아 혼잣말로 하소연을 한다. "엄니 지가 잘못 산 걸까유? 그렇쥬? 잘못 살았나봐유. 옴팡 속은 거 같아유. 거짓말 같아유." 이발관을 하는 그의 친구 고덕춘(양택조)이 말하듯, "시간뿐인 노인네들은 허섭스레기" 짐짝 취급을 당한다. 내다버릴 수도 없고 들고 있을 수도 없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해하는 자식에게 이성복은 이렇게 말하며 속내를 숨긴다. "난 네 아버지지 네 짐이 아녀. 무거워 말어."

추석특집극으로 기획된 '아버지, 당신의 자리'는 이제 폐쇄될 위기에 있는 낡은 역, 청소역을 닮아버린 아버지 이성복을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다. 며느리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면서도 친구에게는 "며늘아가가 얼마가 같이 살자고 그래 쌌는지 귀찮아"하고 오히려 감싸는 이성복을 통해, 아버지의 거취문제가 반찬거리가 되어버린 세태를 거꾸로 꼬집는다. 그들은 엄마가 기차에 치여 죽고난 후, 정신이 이상해져 역사에서 늘 엄마를 기다리는 역전식당 손녀인 미옥(황보라)보다 못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공해 부잣집 딸과 결혼했지만 사실상 그 집의 아들이 되어버린 장남 민철(이정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지만 일단 자기 먹고 살 일에 정신이 없는 딸 청희(이혜은), 어린 시절 막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자신을 괴롭히며 집 주변만을 빙빙 도는 차남 광철(권형준). 그들은 아버지의 낡은 구두가 눈에 밟히지만 자신의 삶에 발목 잡혀 그저 "미안해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렇게 텅 빈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할머니 한말순(정혜선). 옛날 그 막내를 유괴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고 사죄하러 찾아온 그녀에게 이성복은 마음 한 자리를 내준다.

막내가 죽고 아내까지 죽게 된 이후 외로운 간이역처럼 뭐든 버티고 서 있는 게 삶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그 간이역을 기차처럼 들어왔다 떠나버리는 자식들. 속으로는 만신창이지만 겉으로는 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지점에서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던 이들에게 한말순의 출연은 숨겨진 아픈 속내를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현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표정을 가장한 채 어느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가슴 한 켠에 하나씩은 갖고 있을 아픔 같은 것을 들여다본다.

자식들에게 버려진 줄 알고 안쓰러운 마음에 한말순을 텅 빈 자신의 집에 데려와 그녀를 위해 장까지 봐온 이성복. 그것을 가지고 한 끼 맛난 밥상을 차려주고는 자신은 한쪽 구석에서 짠지 쪼가리에 밥을 챙겨먹는 한말순, 그리고 그 옆에서 제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개까지. 이들의 조촐한 한 때의 식사 장면이 그토록 훈훈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우리가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그 속에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추석특집극이지만 정작 추석 시간대에도 밀려난 '아버지, 당신의 자리'는 그 위치 그대로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화려함은 없어도 낡은 것에 대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담담함이 오히려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는 것은 그 드라마가 고스란히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