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잖아. 근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정지혜 ‘정순’

정순

정말 오랜만에 독립영화를 보러갔다. 멀티플렉스에서도 가장 작은 29석 상영관에서 ‘독립적으로’ 나홀로 영화를 봤다. 영화는 정지혜 감독의 ‘정순’. 전 세계 19개 영화제 초청을 받고 무려 8관왕을 달성한 작품이었다. 만일 이런 해외 수상이력이 없었다면 이 독립영화가 멀티플렉스에 걸릴 일은 없었을 터였다. 영화는 좋았다. 저예산 티가 팍팍 났지만, 그래서인지 자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독립영화 특유의 뚝심이 감동적일 정도였다.


영화는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여성 정순(김금순)이 디지털 성범죄를 겪으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차별과 희롱이 일상화된 공장에서 별 문제의식 없이 시키는대로 살아왔던 정순은, 이 지옥을 통해 차츰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디지털 성범죄가 소재지만, 영화는 그 사안에만 멈추지 않고 중년여성으로서 일터에서는 이모로, 집에서는 엄마로 불리던 정순이 자기 이름으로 서는 과정으로 서사를 확장시켰다. 제목이 ‘정순’인 이유다. 정순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엄마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에 분노한 딸이 어떻게든 끝까지 가해자들을 처벌하겠다며 자신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자 정순이 버럭 화를 내는 장면이다. “내 일이잖아. 근데 왜 네가 다 알아서 해?” 정순은 각성하고 변한다. 첫 등장에 딸이 모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정순이 영화 마지막에 익숙하지 않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순이라는 인물이 자기 이름을 찾아가며 삶의 운전대를 스스로 쥐는 모습은 마치 ‘독립영화’가 가진 가치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자본의 논리에 운전대를 맡긴 채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업영화들 속에서 스스로 운전대를 잡겠다는 독립영화의 의지가 정순이 앉은 운전석에서 느껴져서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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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의 소녀들과 <동주>의 청년들

 

영화는 이미 자본의 경제가 된 지 오래다.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는가 하는 점은 그 영화의 성패와 무관하지 않다. 극장에 얼마나 걸어주는가가 흥행의 관건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배급사가 투자사인 우리네 상황에서 투자규모가 큰 영화는 그만큼 극장에서 더 오래 많은 관을 내주게 된다. 그러니 작은 규모의 영화들은 설 자리 자체가 없다. 자본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영화 산업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건 그래서다.

 


사진출처: 영화 <귀향>

그런데 여기 이런 자본 시스템을 거스른 두 영화가 있다. <귀향><동주>. <귀향>은 국민 75270명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 12억을 모아 겨우 제작될 수 있었다. 물론 손숙 같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 배급사에서 관심을 갖는 제작비 규모가 최소 20억 수준(홍보 마케팅비 포함)이라고 한다. 그러니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개봉관이 50개 정도로 얘기가 됐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개봉일 이 영화는 500여개가 넘는 개봉관을 확보했고 그 후로도 계속 개봉관 수를 늘려나갔다. 지난 7일 현재 267만 관객을 돌파했다. 작은 영화의 반란인 셈이다. 산업적인 논리로서는 도무지 벌어지기 힘든 일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냈다. ‘위안부문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 공감대가 기억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

 

윤동주 시인의 청춘을 다룬 <동주>는 고작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정도의 제작비로 이런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여 빈틈없이 제작된 결과다. 5억 원의 규모이니 역시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개봉 당일 개봉관 수는 370개 남짓.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입소문이 나면서 개봉관수도 점점 늘어갔다. 지난 224일에는 467개 스크린으로 확대됐다. 관객 수는 90만 명을 훌쩍 넘어 이제 곧 1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귀향><동주>의 이 같은 선전에는 20대 청춘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지금의 청춘들이 일제강점기라는 한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에 호응한 걸까. 그 키워드는 결국 청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귀향>에서 무고하게 지옥으로 끌려간 소녀들과 <동주>에서 부끄러운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산화한 청춘들이 지금의 혹독한 취업 현실 속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귀향><동주>를 보며 흘리는 청춘들의 눈물에는 그래서 당대의 소녀들과 청춘들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의 현실에 부대끼는 자신들의 아픔도 들어 있다.

 

너무나 작은 규모라서 설 자리조차 찾기 힘든 <귀향><동주> 같은 작은 영화들은 그래서 지금의 청춘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모든 게 태생부터 결정되고 진짜 내용이 아니라 스펙에 의해 모든 미래의 성패까지 달리는 현실. 그것이 지금의 청춘들이 처한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귀향><동주>에 대한 청춘들의 호응은 당연해 보인다. 그 영화가 처한 현실 또한 청춘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귀향><동주>의 이례적인 성공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기적이라 불리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남는다. 왜 이런 일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 못할까. 왜 작은 영화들은, 또 청춘들은 거대한 영화들과 기득권자들에 의해 항상 희생되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때로는 이런 현실도 긍정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는 희망도 이 두 영화의 사례가 보여주었다. 결국 많은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중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라는 얘기다

독립영화에 대한 상업적 조명이 가진 위험성

‘워낭소리’가 1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간다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양상은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관객몰이 하듯 쏟아내던 수치와 유사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결과는 그러나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워낭소리’에 등장한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성공에 따른 수입에 관련된 소문들은 독립영화로서 갖고 있던 진정성의 아우라마저 휘발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오마이뉴스 주최로 열린 특별 상영회에 참석한 이충렬 감독은 이런 상황에 대해 “관객이 늘어날수록 무섭다”며 “차라리 잠적하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워낭소리’가 독특한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여전히 소를 이용한 농사를 고집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소를 조명했다는 데 있다. ‘워낭소리’는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연출의 의도가 꽤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이다. 물론 연출해서 찍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의도가 드러나는 장면을 포착했다는 이야기다. 소가 눈물을 흘리고, 소와 함께 할아버지가 보조를 맞춰 걸어가고, 소와 할아버지가 힘겹게 농사를 짓는데 뒤편에서 기계로 농사를 짓는 장면이 겹치는 장면 같은 것들은 카메라의 앵글 자체가 의도로서 끼여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작위적인 느낌의 영상연출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기획의도인 할아버지와 소를 조명한 그 마음, 진정성을 통해 모두 덮어지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이 진정성이 유지되려면 현실과 영화 사이에 변함 없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이것은 원본(현실)과 복제(영화)가 어느 정도의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복제 속에서도 여전히 아우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진정성이 유지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복제가 원본을 위협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이충렬 감독과 나아가 독립영화라는 현실은 거꾸로 대박이 나면서 상업적 성격으로 둘러싸인 ‘워낭소리’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되고 있다.

독립영화에 있어서 진정성의 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난하다는 것은 거꾸로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어버린 작금의 세상에서, 독립영화의 가난함은 자본논리를 넘어선 어떤 진정성을 담보하게 된다. 물론 그 가난함이 지금처럼 처절한 생존의 문제로까지 와 있는 독립영화의 상황이 긍정적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생존을 넘어서 대박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과도해지는 상업적 논리의 개입이다.

지금껏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독립영화에 갑자기 쏟아지는 정치적, 경제적 관심은 자칫 독립영화라는 본래의 순수한 형태를 왜곡할 수 있다. 대통령이 영화를 찾아서 보고, 문화부장관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 개인의 취향으로서는 이해되는 일이나, 그 위치가 가지는 무게감을 생각해보면 그 순수함을 왜곡시키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독립영화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실로 위험하다 할 수 있다. 상업적 성공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상업적 계산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흔히들 인류학의 문제를 지적할 때, 원주민의 삶을 파헤쳐 보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원주민의 삶을 바꿔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하곤 한다. ‘워낭소리’가 지금 처해 있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와 소가 보여주는 실종된 노동의 숭고함과 그것을 잡아내면서 그 숭고함에 동화되어버린 독립영화로서의 ‘워낭소리’는 이제 거꾸로 영화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워낭소리’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독립영화의 하나로서 갖게 되는 그 진정성에 대한 가치 조명이 아닐까. ‘워낭소리’의 제작자인 고영재 PD는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조차 얼마를 벌었느냐고만 묻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지금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고 있는 가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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