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형 히어로가 슈퍼히어로에게 건네는 말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캣우먼, 엘렉트라... 헐리우드가 가진 슈퍼 히어로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우리는 왜 저런 영웅이 없을까. 하지만 진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우리는 김청기 감독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로봇 태권 V'와 '똘이장군', '슈퍼 홍길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일본 만화가 온통 우리네 TV를 장악하던 시절, 우리의 캐릭터는 애국심이라는 지상가치를 들고 등장했다. 특히 '똘이장군'은 당대 반공이라는 불행한 시대적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며 간첩을 잡거나(간첩잡는 똘이장군), 땅굴(똘이장군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영웅들과 결별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지만(이것 역시 김청기 감독이 주도한 것 같다. 그는 '태권V'를 부활시켰고,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무모한 발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공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할리우드에서는 슈퍼 히어로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기, 우리네 영화 속에서 슈퍼 히어로들은 애초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자본이 일천하고 기술이 일천한 우리네 영화계에서 영웅들은 할리우드보다는 중국식 영웅을 따라갔다. 소위 이소룡, 성룡, 주윤발, 이연걸 하는 중국식의 히어로와 맥을 같이 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진 무협영웅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과 할리우드 시장까지 파고들었지만, 우리네 영웅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고 괴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이웃 같은 인물들이었다. '돌아이'의 전영록이나 '인간시장'의 장총찬,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 같은 서민들이 사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도. 그 계보는 최근의 일련의 우리식 영웅물들, 예를 들면 '홍길동의 후예'나 '전우치' 같은 작품들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슈퍼히어로에 비교해서는 왜소하지만 서민들을 향해있고, 현란하지 않지만 진정성 있는 풍자로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을 꼬집는 것은 본래 우리식 영웅물들의 전통이다. '홍길동의 후예'에서 현대판 탐관오리로 등장하는 이정민(김수로)이 피규어 마니아로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에 빠져있는 모습은 그 대척점에서 우리식의 영웅상을 그려내는 현대판 홍길동과 맞닥뜨리면서 흥미로운 그림을 그려낸다. 그것은 마치 서구식 근대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슈퍼히어로와 우리식의 서민감정이 만들어낸 서민 히어로의 대결양상이다. 서구식 근대라는 개발과 성장의 그림이 그네들 슈퍼히어로들에 반영되어 전 세계를 날아다니는 그 시기, 그 근대의 그늘 속에서 억압되어온 서민들은 저들만의 히어로를 만들어낸다. 전 지구적 영웅이 사실은 꽤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을, 이들 서민 히어로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행적들을 통해 보여준다. 지구를 걱정한다면, 당장 눈앞의 작은 현실부터 바라봐야 한다고 이들 서민형 히어로들은 말하고 있다.

‘일지매’, 우리식으로 해석한 가면 영웅담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갑의와 가면, 그리고 일지매(이준기)의 은신처가 연상시키는 것은 배트맨이다. 깊은 지하에 숨어 그만큼의 깊은 고독을 가진 존재로, 밤에 주로 활동하고, 이중생활을 하며 슈퍼맨처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지매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변식(이원종) 대감이 습관적으로 붙여버린 ‘박쥐새끼’라는 별명 또한 우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배트맨을 닮았지만 무언가 다른 일지매
하지만 ‘일지매’가 사극이라는 점은 이 외국산 슈퍼히어로물의 답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사극 속에서이지만 ‘일지매’가 가진 현대적인 스타일은 물론 지금의 젊은 층들이 열광하는 세련된 슈퍼히어로를 닮은 것이 분명하지만, 일지매는 전형적인 한국적 정서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것이 주로 발견되는 것은 일지매가 쓴 그 가면을 활용하는 지점에서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지만, 일지매는 그 목적이외에도 가면이 활용된다.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가면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따라 일지매도 두 인물로 분화된다. 그 하나는 용이고 다른 하나는 겸이다. 일지매라는 가면의 영웅은 겸이로서 과거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고 복수하려는 인물이며, 용이는 현재의 쇠돌(이문식)과 단이(김성령)의 아들로서 조금은 불량기가 있는 청년이다. 따라서 가면을 쓴 상태의 일지매는 과거의 아픔을 가진 슬픈 존재며, 벗은 상태의 용이는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생각 없이 건들대는 그런 존재다.

이 두 인물이 공존하는 일지매는 그 가면이 주는 간극 속에서 서로의 내심을 숨겨야만 한다. 용이는 늘 그런 거들먹대는 사람처럼 연기해야 하고, 겸이는 가면 아래 자신의 과거와 슬픔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자신을 키워준 쇠돌과 단이에게마저 불량아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어린 시절, 어머니를 부정해야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일지매에게 예정되었던 불행이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어머니를 만난 그 순간에도 반복된다.

가면 속의 슬픈 정서, 서민들의 얼굴
따라서 일지매라는 슈퍼히어로가 가진 정서는 가면으로 가려지면서 더욱 배가되는 슬픔이다. 가면의 영웅이 영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변사람들이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을 때까지다. 따라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영웅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얼굴을 본 자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혹은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으로 엮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가진 공식이다. 하지만 이 양상이 ‘일지매’로 와서는 그 특유의 슬픔의 정서와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얼굴을 본 자가 일지매를 위해 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기꺼이 달려간다는 것이다.

쇠돌이 일지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순간 사실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쇠돌이 용이의 불쌍한 삶을 이해하게 되고 기꺼이 일지매 가면을 쓰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관계에 열광하는 우리네 정서를 잘 활용한 가면의 활용법이다. 이러한 선택은 봉순(이영아)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면이 이런 슬픈 정서에 활용된 것일까. 그 이유는 ‘일지매’ 특유의 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사극에서 가면을 쓴 자는 일지매만이 아니다. 일지매는 그것이 상징적으로 도드라지게 표현된 것뿐이지,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초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오빠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은 봉순이, 그 살인을 저지르고 죄의식을 숨기며 살아가는 공갈아제(안길강),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얼자로서의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란 시후(박시후), 친 혈육 한 점 없는 극단의 고독을 숨기며 살아온 쇠돌(이문식), 그리고 첩으로서 버려지고 아들마저 버릴 수밖에 없었던 단이까지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 때론 유쾌하고 때론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가면의 얼굴은 우리네 서민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늘 웃고 있지만 그 안에 힘겨움과 아픔과 고통을 숨기고 있는 서민들의 얼굴 말이다. 일지매가 보여주는 가면의 슬픈 정서는 바로 이 현재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진정한 의미로 일지매가 의적으로서 서민들의 영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슬픔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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