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만으로 현대사를 관통하는 문제작, <황금의 제국>

 

“시멘트 가루 맛보던 혓바닥이 돈 맛을 보고 나니까 세상천지가 다 돈으로 보여. 회사도 공장도 사람도 저놈 저거 얼마짜리다. 저건 얼마짜리다. 한성제철이 네 손에 들어가 있으면 서윤이하고 싸우겠지. 너도 서윤이도 시멘트가루 맛은 본 적이 없고 돈 맛만 아니까. 10년 20년 결국 너도 내 나이가 될 거다. 민재야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 너 안 느끼게 하고 싶어. 애비 마음이 그래.”

 

'황금의 제국(사진출처:SBS)'

성진그룹을 형 최동성 회장(박근형)과 함께 일궈낸 최동진(정한용)이 아들 최민재(손현주)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본론>으로 얘기하면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바뀌는 지점에서부터 생겨나고 폭주하는 자본의 생리를 최동진은 몇 마디 대사로 툭 던져놓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80평짜리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했다. 시멘트가 한 포대 나올 때마다 거 신기하고 내가 만들었다 생각하니까 자식 같고 어떤 날은 찍어서 시멘트 가루 맛도 봤어. 근데 아파트가 무너지고 어쩌다가 청마건설을 인수했어.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성진시멘트보다 몇 배나 더 큰 회사가 우리 손에 들어왔지. 그 때부터 돈으로 회사를 샀고 형님하고 싸우고 내 인생의 반 토막은 드러내고 싶어.”

 

개발시대를 거쳐 90년대 IMF 겪으며 돈이 돈을 먹는 자본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을 <황금의 제국>은 당대의 인물을 표상하는 캐릭터들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온전히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상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암투와 대결이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듯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서 마치 왕조사극의 현대판을 보는 듯하다. 왕조사극이 왕과 신하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구도를 통해서 당대의 역사적인 변화를 포착해내듯이, <황금의 제국>은 최동성 회장이라는 제국의 가족사를 통해 당대의 경제사를 그려낸다. “저는 왕건이 될 겁니다.”라며 궁예(최동성 회장을 빗대어)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최민재의 말은 이 드라마가 상당 부분 왕조사극의 구성을 끌어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놀라운 건 그래서 이 드라마는 거의 야외촬영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인물들끼리 이합집산하며 부딪치는 장면들이고, 가끔 성진그룹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서윤(이요원)의 모습과 장태주(고수)가 이끄는 에덴에서 윤설희(장신영)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최동성 회장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할 것인가 가족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가족이 대결을 벌이는 9회는 거의 70%를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정적인 느낌을 주기보다는 긴박감 넘치는 역동감을 선사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욕망이 확실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의 제국>의 전제는 이 집안이 최동성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저녁 식사 시간에 말 한 마디로 계열사의 주인이 바뀌기도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수 조 원이 움직이는(그래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업이 이 가족 구성원들의 말 한 마디,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는가 하는 결과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 보다 흥미진진한 게임이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가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지는 건 이것이 단순히 가족 내 서바이벌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거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동성 회장의 죽음에 이어 벌어진 가족 내의 대결은 그래서 이 모든 욕망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가 본색을 드러냈고 자식들은 고인을 애도하기보다는 일제히 자기 몫을 챙기려 안간힘을 쓴다. 고인의 영정 앞에 모여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은 그래서 섬뜩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워낙 국민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추적자>와 비교해 <황금의 제국>은 그 성취가 낮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추적자>가 우리 사회의 정의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 한 개인의 고군분투를 다뤘다면, <황금의 제국>은 그 개인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를 시대를 거쳐 그 시스템이 완성된 뿌리에서부터 들춰보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 것인가. <황금의 제국>의 도발은 그래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1997년에 대중들이 응답한 이유

 

왜 굳이 1997년이었을까. <응답하라 1997>이 상정하는 1997년은 두 가지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해다. 그 하나는 HOT와 젝스키스로 대변되는 대중문화의 폭발기였다는 점이고(이 당시 음반 판매량은 몇 백만 장 단위로 기록되곤 했다), 다른 하나는 IMF 사태가 터지는 해로서 그 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우리 서민들의 경제생활이 계속 추락해왔다는 점이다(이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응답하라 1997'(사진출처:tvN)

이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사건, 즉 대중문화의 폭발과 IMF사태라는 경제현실은 그러나 그 안에 ‘대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얽혀져 있다. 대중들은 이 힘겨운 시기를 무엇으로 버텨냈을까. 그 해답을 제시하는 드라마가 바로 <응답하라 1997>이다. 2012년 한 동창회 풍경으로부터 끊임없이 1997년도로 플래시백 하는 이 드라마는 수많은 당대의 대중문화 트렌드들을 담아낸다.

 

거기에는 HOT가 있고 젝스키스가 있으며 그들을 추종하는 이른바 ‘빠순이’들이 있다. 또 다마고치가 있고, 삐삐가 있으며, PC통신과 채팅이 있고 당대를 달구었던 영화와 드라마들, 프로야구 심지어 815독립콜라 같은 상품은 물론이고 ‘광수생각’ 같은 책도 있다. 그런데 이들 수많은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들이 과연 그저 당대를 추억하게 하는 목적으로 동원된 것일까. 설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오브제들이 떠올리는 결과가 아니라,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그 오브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경제적인 부를 가진 이들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중들은 무엇으로 이 힘겨운 시기를 위로받으며 살았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보면 대중문화가 가진 새로운 힘을 실감하게 된다. 청춘의 격랑을 버텨내고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성시원(정은지)을 끝까지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HOT 같은 당대의 대중문화였다.

 

누군가는 팬클럽이 되어 열렬히 오빠들(?)을 쫓아다니며 위안을 받았고, 누군가는 농구대잔치와 영화에 빠져들었으며, 또 누군가는 음성적인 빨간 책(?)에서 도피적인 위안을 받았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지냈지만 그 위로의 재료는 다름 아닌 그들이 공유한 대중문화였다. 그 지평 위에서 그들은 같은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며 공감함으로써 계속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당대 서민들에게 있어서 대중문화가 어떤 의미였는가를 가장 잘 드러낸 시퀀스는 시원의 아버지인 성동일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면이다. 같은 병동에 있는 환자들을 위무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다. 그 속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에 흠뻑 빠져있는 환자들은 그러나 그 주인공이 암에 걸리는 장면에서 고개를 돌린다. 성동일의 아내인 이일화는 투병하는 남편과 같은 병동 환자들을 위해 그 드라마 작가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주인공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대중문화를 통해 위로받고 심지어 살아갈 수 있었던 당대의 풍경을 압축한 장면이다.

 

그런데 왜 하필 대중문화일까. 그것은 IMF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물론 값싼 대중들의 여가라는 점이 대중문화를 당대의 가치로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IMF가 가져온 것은 대중들의 각성이다. 대중들은 이때부터 위로부터 주어지는 삶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 등등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인터넷 같은 수평적인 대중들의 매체가 생겨나는 시점과 궤를 같이 하면서 대중들에 의한 대중들을 위한 대중들의 시대를 소망하게 만든다. 그간 어딘지 폄훼되어왔던 대중문화가 점점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응답하라 1997>의 성공은 그저 복고에 편승한 추억콘텐츠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IMF로 표징되는 저들의 문화의 거품이 빠지는 시기였던 90년대 말, 대중문화가 폭발하는 그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97년 이후 2012년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통해 위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그 공감대가 그 성공의 진면목이다.

 

그래서 작금의 대중들, 즉 90년대를 경험했던 중년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지금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청춘들은 모두 이 1997년에 기꺼이 응답하게 된다. 거기에는 대중문화만이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는 살풍경한 현실과, 그럼에도 우리에게 어떤 대중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대중문화에 대한 경험이 깔려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대중문화로 공유되는 대중들의 힘은 현실을 바꿔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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