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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선덕여왕', 미실과 덕만의 100분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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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란 이런 것, '선덕여왕'의 대결구도가 시사하는 것

"헌데 왜 진흥제 이후의 신라는 발전을 안한 겁니까?" 덕만(이요원)은 미실(고현정)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신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인가를 미실에게 묻는다. 미실은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하지만, 이미 답은 마음 속에 갖고 있다. 그 생각에 골몰해있는 미실의 마음을 아는 건 설원공(전노민)이다. 그는 미실에게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신분 따위로 누구를 부러워하는 건 저로 족합니다." 라고 말한다. 미실은 그것이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 왕비가 될 수 없는 그 신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꿈꾸는 것조차 한계가 그어지는 신분계급 사회 속에서 미실은 그 이상을 꿈꿀 수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거기에 대한 답은 오히려 질문을 한 덕만이 던져준다. "새주님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인이 아니시니 남의 아기를 키우는 듯 싶었겠지요.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한 꿈을, 백성을 위한 꿈을 꾸겠습니까. 꿈이 없는 자는 절대 영웅이 되지 못합니다. 꿈이 없는 자의 시대는 한 발작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미실에게는 뼈아픈 것이다. 그녀를 가로막는 태생적인 한계, 즉 성골이 아니라는 점은 꿈조차도 한계를 짓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질문을 던지는 덕만은 저 스스로 "왕비가 아닌 왕이 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것 역시 미실에게는 아픈 것이다. 자신은 이미 여성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고 왕비 그 이상을 꿈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실과 덕만의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하는 설전은 그녀들이 처음 탁자를 가운데 놓고 앉을 때부터 예고되었던 일이다. 그 첫 번째 안건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견해였다. 미실이 백성들은 환상을 원하고 그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덕만은 환상이 아닌 희망을 내세운다. 같은 현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 이 환상과 희망이라는 어감의 차이는 실로 크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미실은 "자기보다 더 지독한 짓"이라고 일갈한다. 어찌 보면 정치가가 제안하는 희망이란 그저 환상에 머물 수도 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동참하게 만드는 희망의 정치는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현실주의자 미실의 생각이다.

그 다음 토론의 주제로는 경제가 올랐다. 흉년이 들어 곡물 가격이 자꾸만 오르는데도 그것을 비싼 값에 매점매석하는 귀족들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덕만은 그것이 결국 자영농들을 몰락시켜 소작농으로 부리려는 귀족들의 속셈 때문이라는 것을 미실을 통해 알게 되고, 귀족들에게 그 행태를 비판하지만, 귀족들은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자유 시장 경제와 정부의 통제라는 두 시각이 부딪치는 지점이다. 요지부동인 귀족들을 되돌리기 위해서 덕만은 결국 시장의 논리로서 해법을 제시한다. 궁의 비축미를 풀고 군량미마저 풀 거라는 소문을 내자 가격이 떨어지고 거꾸로 귀족들은 싼 가격에 곡물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실과 덕만의 설전이 흥미롭다. 백성들에게 철제로 만든 농기구와 황무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덕만에게 미실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과 희망과 소통으로 백성을 다스린다구요? 백성은 진실은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은 버거워하고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백성은 즉물적이예요. 떼를 쓰는 아기와도 같죠.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게, 포상은 조금씩 천천히." 그 말이 예언하듯 결국 농기구와 황무지를 받은 농민들이 도망을 치고 덕만은 저 스스로 미실이 얘기한대로 폭풍처럼 가혹한 처벌을 백성들에게 가하게 된다. 여기서 덕만은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자들은 꿈꿀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좀더 현실적으로 천천히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100분 토론의 새로운 연사로 등장한 이가 김춘추(유승호)다. 그는 여성의 신분이지만 유일한 성골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겠다는 덕만을 가로막고, 또 미실 세력을 갈라놓기 위해 골품제도를 비판한다. 지금으로 치면 선거제도가 이 토론의 주제가 된 셈이다. 김춘추는 "골품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는 천한 제도"라고 일갈하며 덕만을 공격하고, 그 말에 미실은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절망은 자신은 왜 골품제에 대한 부당함을 넘어서보려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회한이고, 희망은 이제 덕만이 깨버린 금기, 즉 여성이 왕이 되려는 것과 김춘추가 깨버린 금기 골품제라는 한계가 깨져버리는데서 오는 것이다. 덕만과 미실의 긴 100분 토론은 덕만의 일방적인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미실이 그 반사이익을 얻게 된 셈이 되었다.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덕만과 미실의 100분 토론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를 떠나서 그 토론의 과정이나 방향성이 흥미롭다. 팽팽한 대결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파트너처럼 여기며 스스로를 성장시킨다. 미실과 덕만은 서로가 던진 질문에 답을 구하며 성장해나간다. 그 선악구도가 어떻든 그 과정이 건전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 정치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대소신료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다가 드잡이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국회의 모습을 풍자했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은 이 사극에서 얼마나 대중들이 정치, 경제적인 사안들에 민감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덕여왕', 덕만과 미실의 100분 토론이 흥미진진한 것은 물론 그 잘 조화된 극적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그 상생의 이야기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