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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속도감 있는 '천사의 유혹', 좋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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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역할극으로 만드는 감정이 얹어지지 않는 속도감

시놉시스를 드라마로 만들었나. '천사의 유혹'을 보다보면 그 머리가 핑핑 돌아갈 정도의 속도감에 심지어 이런 생각마저 떠오르게 만든다. 이제 3회 분량을 방영했을 뿐이지만 그 스토리는 보통 드라마들이 흔히 20회 정도의 분량에도 담기 어려운 점입가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혹자는 그래서 단 "첫 회를 보고도 16회를 다본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 원수인 신우섭(한진희)의 아들인 신현우(한상진)와 결혼을 한 주아란은 정부인 남주승(김태현)과 불륜의 관계를 남편인 신현우에게 들키게 되고, 바로 그 날 신현우를 태우고 가던 주아란은 말다툼 끝에 차 사고를 당하게 된다. 주아란은 신현우가 혼자 운전하다 사고를 낸 것처럼 위장하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신현우가 깨어나려 하자 그를 없애버릴 마음까지 갖게 된다.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진 신현우는 한 달 후 주아란의 계략에 의해 별장으로 옮겨져 방치되게 되는데, 거기서 신현우가 도와주었던 고아원에서 간호사가 된 윤재희(홍수현)를 만나게 된다. 결국 윤재희가 신현우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살려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

'천사의 유혹'은 이렇게 대충의 스토리를 적어보아도 절대로 3회 분량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 '천사의 유혹'이 전작인 '아내의 유혹' 같은 빠른 스피디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과연 좋기만 할까. 흔히들 '속도감 있는' 드라마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것은 그간 그저 그런 구도를 가지고 질질 끄는 드라마들이 식상해진 결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속도감은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천사의 유혹'이 보여주는 속도감은 '아내의 유혹'에서도 그랬지만 스토리의 억지스러움을 가리는 장치처럼 사용된다. 신우섭의 사업장에서 어이없게도 사고로 죽음을 당하는 주아란의 아버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그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복수를 꿈꾸고, 그 화살이 신우섭의 아들인 신현우에게 돌려진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필 정부와의 밀회가 들통 나는 그 날 사고가 나는 것이나, 이제 별장으로 옮겨져 뇌사상태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게 된 신현우가 마침 그가 도와주었던 윤재희를 만나게 되는 상황도 지나친 우연의 남발이다.

이것은 멜로드라마적인 감정 과잉의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설정이다. 즉 논리적으로는 그 인과관계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감정적으로 끌어가는 멜로드라마 속에서는 어느 정도 허용되는 스토리 구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멜로드라마가 이러한 허용이 가능한 것은 충분히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설득력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천사의 유혹'은 그 속도감으로 인해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속도감 있는 '천사의 유혹'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빠른 전개는 시청자로 하여금 인물들에게 쉬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마치 인형 같은 캐릭터들의 역할극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드라마가 보이는 경향은 과도한 사건에 대한 집착이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들과 국면의 전환이 없으면 드라마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게 된다. 감정이입이 주는 감정적 힘이 부재한 이 상황을 자극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넘어서려는 경향이다.

'천사의 유혹'이 처한 또 하나의 난제는 이것이 '아내의 유혹' 같은 일일드라마가 아니라 월화드라마라는 점이다. 일일드라마에 대한 기대치와 월화드라마 같은 미니시리즈에 대한 기대치는 확연히 다르다. 미니시리즈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얼개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일드라마는 매일 방영된다는 이점이 있어 그 속도감이 갖는 긴박한 스토리 전개에 대한 반복적인 몰입감을 줄 수 있지만, 월화드라마에 집중된 형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속도감이란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과도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속도감을 요구하는 것은 느슨한 전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속도를 과도하게 부여하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감정이 얹어지지 않는 과도한 속도 위의 드라마에서 인물은 살아나기가 어렵다. '천사의 유혹'이 가지는 지나칠 정도의 속도감의 유혹은 따라서 그만큼의 한계도 갖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