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에서 해리까지, 망가질수록 빛나는 그들
연기자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언제일까. 그것은 연기자 자신이 아닌 캐릭터에 몰두할 때이다. 그래서일까. 연기자들이 여지없이 망가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이 가장 빛나게 되는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시트콤이 가진 특성상 연기자들의 망가짐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시트콤 같은 코믹 장르가 가진 웃음은 기존 이미지의 전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했을 때, 시트콤은 드디어 큰 웃음을 주게 된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 ‘망가짐의 미학’을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인물은 이순재다. 칠순의 나이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 연기에 어찌 창피함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김자옥을 위한 이벤트를 하기 위해 ‘네버 엔딩 스토리’를 열창하다 쓰러지기도 하고, 연실 북북 나오는 방귀를 그녀 앞에서 참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한다. 그의 연인 김자옥과 원어민 강사인 줄리엔이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질투를 할 때는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망가짐의 끝에 그러나 이순재가 얻은 것은 역시 진정한 연기자라는 호평이다.
이순재의 아낌없는 망가짐의 솔선수범, 그 결과일까. ‘지붕 뚫고 하이킥’의 다른 연기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미학(?) 속으로 들어간다. 황정음은 술에 떡이 돼 해변에 쓰러져 잠든 ‘떡실신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준혁에게 누나 소리를 듣기 위해 남장을 하고 연기를 하는 ‘황정남’에서 뻥 터졌으며, 술에 취해 세경과 함께 웃음과 눈물의 이중주를 보여줌으로써 연기자로서의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한없이 망가지지만 여전히 귀엽고 발랄해 보이는 건 그녀만의 매력. ‘지붕 뚫고 하이킥’을 통해 황정음은 연기자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굴욕 연기에도 명품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정보석의 것이다. 김병욱 PD가 늘 시트콤을 통해 그려왔던 굴욕당하는 가장의 모습은 ‘순풍산부인과’와 ‘똑바로 살아라’의 박영규에서부터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준하를 거쳐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보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늘 구박을 받는 존재로서 가부장제의 해체가 주는 통쾌한 웃음은 물론이고, 현 시대가 그려내는 가장들의 쓸쓸함까지 잡아내는 존재들이었다. 정보석은 완벽해 보이는 외관(외모는 물론 지위까지)과는 상반되게 덜떨어진 모습을 진지하게 보여줌으로써 명품 굴욕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꼬마 악역 정해리를 연기하는 진지희다. 지금껏 이처럼 독한 아역을 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아내의 유혹’을 패러디한 ‘해리의 유혹’편에서 민소희로 변신한 모습은 그 독한 설정을 과장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역시 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늘 신애의 물건을 “내거야”하면서 빼앗던 해리가 신애가 쓴 동화를 끝까지 읽기 위해 갖은 일을 해내는 장면은 독함과 귀여움이 교차하는 해리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밖에도 ‘지붕 뚫고 하이킥’에는 호감 가는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이현경 역할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오현경이 그렇고, 이순재와 멜로 연기를 보여주는 김자옥이 그러하며, 한없이 불쌍한 신파적 존재로서 보여지다가도 꽤 엉뚱하고 예쁜 면모를 드러내는 신세경이 그렇다. 신세경을 중심으로 다층적인 멜로를 이루는 이지훈(최다니엘)과 정준혁(윤시윤)도 까칠함과 세심함을 왔다 갔다 하며 매력을 드러내고 있고, 원어민 강사로 나오는 줄리엔의 따뜻함과 거꾸로 말하는 반어법 교장선생님도 짧지만 큰 웃음을 주는 존재다.
이처럼 ‘지붕 뚫고 하이킥’에 포진한 연기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망가뜨려 큰 웃음을 주는 연기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이들 연기자들은 지금 이른바 ‘재발견’되는 기회를 얻고 있다. 이 작품 전과 이 작품 후의 이들 연기자들이 가지게 될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작품이 주는 기회의 크기를 새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망가질수록 빛나는 그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보여주는 망가짐의 미학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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