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보다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아이리스'
'아이리스'가 종영했다. 단 20부작으로 두 달여 정도의 여정이었지만 이 작품이 남긴 여운은 꽤 크다. 아마도 그 빈 자리는 한 동안 우리의 뇌리 한 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현장 속에서 흔들리며 짧게 짧게 편집된 숨 가쁜 영상들이 만들어낸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드라마 체험은 우리에게 그토록 새로운 것이었다. 감정선에만 깊게 박혀있던 우리네 드라마의 두 발은 '아이리스'를 통해 저 미드들이나 하는 것이라 치부했던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경험이 단지 실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리스'가 보여주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아이리스'가 취한 철저한 오락드라마로서의 자세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아이리스'는 어떤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런 드라마라고 보기 어렵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남북한이 공조해 국가를 뛰어넘는 아이리스라는 새로운 주적에 대항한다는 정도.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각별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도 아니다. '아이리스'는 메시지를 추구하기보다는 블록버스터 드라마가 갖추어야할 장르적 재미를 충실히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드식의 스파이액션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르적 재미를 우리 드라마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멜로적 감성을 잘 버무림으로써 이 이국의 콘텐츠를 우리 식으로 풀어냈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다. 스토리는 많은 장르들 속에서 이미 본 듯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냉전시대가 지나면서 스파이 액션물들은 사라져 갔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분단국가가 우리나라라는 점은 여전히 이 장르가 유용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연출은 스파이액션물이라는 오락 장르가 가진 문법에 충실하다. 시종일관 긴장감이 유지되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며 이야기는 계속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여기에 다른 점이라면 우리 식의 멜로가 적절히 포진한다는 점이다. 최승희(김태희)와 김현준(이병헌)이 일본의 아키타현에서 만들어낸 멜로의 힘은 드라마 전반에 걸쳐 흐르면서 급박한 액션 사이 사이를 채워 넣는다. 겉으로 드러난 멜로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싸우는 지도 모르는 최승희나 김현준 그리고 진사우(정준호)의 액션은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조직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사적인 멜로와 부딪칠 가능성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마치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 숨겨놓은 조직의 비밀은 이 드라마가 움직이는 추동력이 된다. 이 드라마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끊임없이 액션의 상황 속에 들어가는 이유가 비밀에 붙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액션에 빠져들면서도 궁금증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해간다. 그리고 이 아이리스라는 조직의 비밀은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성에 김현준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현준의 죽음으로 안타까운 멜로는 여전히 남았고, 아이리스라는 조직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충분한 재미를 주었지만 거의 출발선 상에 다시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대로 시즌2를 만든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비밀에 싸인 조직이라는 추동력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이고, 그 위를 달려 나갈 새로운 인물들과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아이리스'는 계속해서 시즌을 이어갈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드라마라고 하면 지나치게 결과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과보다는 과정의 재미에 충실하다. 결과에 치중하는 드라마가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과정에 충실한 드라마는 순간순간의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장르 영화가 갖는 사고방식이다. 몇 시간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장르적 즐거움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것. '아이리스'는 이것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시즌2를 통해 그 즐거움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옛글들 > 드라마 곱씹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의 유혹', 만일 속도를 조금 늦췄다면 (0) | 2009.12.23 |
---|---|
'선덕여왕', 우리를 꿈꾸게 한 사극 (0) | 2009.12.23 |
‘지붕킥’의 멜로, 그 특별한 사랑법 (0) | 2009.12.16 |
'차차차'와 '천유', 속도체험 극과 극 (0) | 2009.12.15 |
'선덕여왕'은 연장방영으로 무엇을 잃었나 (3) | 2009.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