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차차차'와 '천유', 속도체험 극과 극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차차차'와 '천유', 속도체험 극과 극

D.H.Jung 2009. 12. 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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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닮은 꼴, '다함께 차차차'와 '천사의 유혹'

"오늘은 드디어 비밀이 밝혀질까?" '다함께 차차차'를 보는 분들의 마음은 한결 같다. 하지만 이 일일드라마가 끝나는 지점에서의 반응도 한결 같다. "또 저러고 끝나네?" 이것이 '다함께 차차차'가 지금껏 시청자들을 끌고 온 방식이다. 120여회 동안 이 드라마가 해온 이야기는 실로 앙상하다. 가족드라마가 담기 마련인 다양한 세대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결혼을 하려는 진우(오만석)와 나윤(조안)을 끝없이 가로막는 점입가경의 인물들로 점철되면서 퇴색해버렸다.

처음에는 너무나 격차가 나는 집안이라서, 또 이미 정해놓은 배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던 나윤의 모친인 은혜(이응경)는, 점점 잃었던 기억을 되찾아가는 자신의 남편이 진우의 작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는 거꾸로 결혼을 빨리 시키려 한다. 그렇게 하면 남편인 신욱(홍요섭)이 본래의 처인 윤정(심혜진)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진우와 나윤의 결혼을 허락해주자고 했던 신욱은 자신이 윤정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거꾸로 결혼을 반대하기 시작한다.

마치 마구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하나를 끌어당기면 다른 하나가 엉켜버리는 식의 이 드라마 구조는 가족과 가족 사이에 만들어지기 힘든 인연의 줄을 과도하게 이어놓음으로써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가운데 두고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아마 몇 개월 전에 이 드라마를 보다가 지쳐서 한동안 보지 않던 분이라면 다시 드라마를 봤을 때 "아직도 그대로야?"하는 반응이 나올 법한 일이다. 지나치게 질질 끌어가는 드라마에 지치면서도 "그래도 오늘은.." 하는 마음에 자꾸 보고는 "또 낚였다"는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얄팍한 편법으로 이 드라마는 30%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반면 '천사의 유혹'은 그 속도감에 있어서는 '다함께 차차차'와는 정반대다. '다함께 차차차'를 보고 '천사의 유혹'을 연달아 시청해보면 그 속도가 얼마나 다른 지를 실감할 수 있다. '다함께 차차차'가 120여회 동안 했던 이야기는 '천사의 유혹'의 1회분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만큼 '천사의 유혹'은 속도가 빠르고,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나간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다함께 차차차'와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천사의 유혹' 역시 비극적인 두 가족사를 얼기설기 엮음으로써 끊임없는 극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주아란(이소연)에 의해 사지에 던져지는 신현우(한상진), 가까스로 살아나 안재성(배수빈)으로 변신(?)하여 주아란에게 다시 복수하려는 신현우, 그러나 신현우가 사랑하는 윤재희(홍수현)와 주아란이 자매지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주아란의 정부로 그녀를 돕던 남주승(김태현)은 신현우의 모친의 숨겨진 아들이고... 이 비밀로 점철된 관계의 실타래는 실로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니 그 관계 하나하나를 들추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는 쉬지 않고 달려 나가는 힘을 발휘한다. 그나마 이 드라마의 미덕이라면 질질 끌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다함께 차차차' 같은 속도로 이 드라마가 전개된다면 1년 이상을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쉬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속도감이 가져오는 부작용도 크다. 인물들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있고, 따라서 드라마는 점점 후반부로 오면서 연극적인 느낌으로 변모하게 된다. 비장한 대사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연극이 아니라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연극적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나름 게임처럼 재미를 주는 구석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실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험이라는 말로 기본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는 너무나 느리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너무 빠르다. 그런데 그 속도감 이면을 바라보면 그 설정들이 너무나 비슷하다. '다함께 차차차'와 '천사의 유혹'의 이 다른 듯 닮은 구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관계에 대한 집착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들에 우리가 지나치게 관용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그 관계들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지치게 되고, 빠른 속도로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자극적인 상황만을 보면서 그 본질이 가진 진지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는 상투적인 것이 될 만큼 드라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