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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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테인먼트 시대, 아나운서들의 딜레마

D.H.Jung 2006. 11. 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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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