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스토리는 우리네 옛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도 이 변신 스토리가 들어있을 정도. 동물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버텨낸다. '구미호' 이야기는 인간이 되기를 희구하는 천년 묵은 여우의 이야기다. '전설의 고향'의 단골 소재로서 '구미호' 이야기는 매년 반복되어 제작되어왔다. 누가 '구미호' 역할을 할 것인가는 당대의 인기 있는 여배우를 가름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동안 사라지기도 했지만 '구미호' 이야기는 계속 명맥을 이어가며 1977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30여 년을 관통하고 있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무엇이 이토록 시대를 넘어 리메이크되게 하는 걸까.
'구미호' 이야기는 보수적이면서도 파격적이다. 이 이야기의 기반은 다름 아닌 보수적인 사회가 제공하는 억압에 있다. 인간이 되려는 여우는, 인간과 여우 사이에는 확연한 금을 그어놓는다. 즉 여우 스스로 자신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을 희구하는 이 틀 속에는 다른 두 존재 간의 서열적인 차별이 내재화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 반상의 구별을 그대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구미호'라는 공포의 탄생은 이야기 속에서나마 이러한 억압을 벗어던지고 차별에 대항하는 인물을 꿈꾸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구미호'는 그 체계 속에서 사랑받는다고 믿었던 억압된 존재들(여성이거나 천민이거나)이 어느 순간 자신들은 태생적으로 저 체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감의 표상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이야기의 기반은 이 공포의 틀 속으로 들어오면 파격적인 이야기로 변신한다.
하지만 구미호는 결국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함으로써 그 보수성을 유지한다. 그 유명한 대사, "더러운 것이 정이라더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계를 뒤엎지 않는 안전한 이야기로 '구미호' 이야기를 회귀시킨다. 이 옛 이야기가 '전설의 고향'이 방영되던 70년대 정서와 맞닿은 부분은 당대의 시집살이가 한 몫을 차지한다. 가부장제 하에 억압받던 며느리들에게 '구미호' 이야기가 갖는 파격성은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더러운 것이 정이라"는 그 보수성의 회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구미호' 이야기는 이처럼 리메이크되는 당시의 사회적 억압을 그 공포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폭발력을 얻는다. 그렇다면 2010년 시리즈물로 돌아온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지금까지의 '구미호'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시키고 있을까. 구미호 이야기 자체가 갖는 보수성은 사실상 2010년이라는 시간대에는 그다지 공감의 폭이 넓지 않다. 따라서 대신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천착하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자식사랑이다.
이것은 구미호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의 대결로 그려진다. 구미호(한은정)는 자신의 딸 연이(김유정)를 구하려고 하고, 인간 윤두수(장현성) 역시 자신의 딸인 초옥(서신애)을 구하기 위해 연이의 간을 빼 먹이려 한다. 모성애와 부성애의 대결. 그런데 여기에는 단지 대결구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두수와 구산댁(구미호) 사이에 멜로 라인으로 두 인물은 갈등하게 된다.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서는 연이를 죽여야 하지만, 윤두수는 또한 그 연이의 어미인 구산댁을 사랑하게 된다. 개인적인 사랑과 부성애 사이에서 윤두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이것은 구산댁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딸을 죽이려 하는 윤두수지만 "그 놈의 정 때문에" 또 구미호는 갈등하게 된다.
2010년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이처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적인 갈등에 더 천착한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신들의 사랑이 부딪치는 이 작품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와 조우하는 면이 있다. 자신의 삶과 부모로서의 삶, 어쩌면 그 사이에서 구미호와 윤두수를 억압하는 건 자식이라는 어쩔 수 없는 천륜이다. 그래서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조금 밋밋해 보이긴 하지만 그 보편적인 자식사랑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단편이 아니라 시리즈물이란 점이다. 시리즈물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모성애, 부성애, 사랑, 애증, 자매애, 권력관계 같은)이 제공된다면 이 작품은 새로운 '구미호' 이야기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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