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구도의 재현은 대중들을 공감시키지 못한다
"마마 대응책이라뇨? 지금 그걸 누가 마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마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마마께서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뿐입니다. 그게 정치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린 장희빈(김소연)은 남인의 수장, 오태석(정동환)을 불러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싸늘하다.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는 장희빈 자신의 말대로 된 것이다. 힘이 없어진 그녀는 이제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할 위기에 처했다.
장희빈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힘의 불균형이 있을 뿐이다. 사실 권력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어떤 실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사람의 심성, 의지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달라지는 것은 그 권력관계 속에 들어가는 인물들뿐이다.
'동이'에서 장희빈이 초반부에 동이(한효주)의 도움을 받아 중전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마치 선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중전에 오르자 입장은 달라졌다. 권력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권력을 쥔 것이 아니라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입장이 달라진 것뿐이다. 따라서 권력을 얘기하면서 흔히 권력을 쥔 자는 악이고 권력에 이끌리는 자는 선이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동이 역시 그 상층부의 권력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처럼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동이'의 장희빈이 '선덕여왕'의 미실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이 사극의 구도가 지나치게 선악구도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동이는 무조건적인 선이고 장희빈은 악이다. 권력이 없는 동이와 권력자인 장희빈의 대결구도, 그래서 장희빈을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동이가 쥐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그려진다. 여기에 사극은 장희빈이 저지르는 일련의 일들을 부도덕한 처사로 몰아간다. 즉 게임의 법칙, 정정당당함을 잃은 장희빈은 악이 되는 것이다.
장희빈의 몰락은 그래서 권선징악적인 이 사극의 목표처럼 보인다. 바로 이 단순한 구도는 장희빈이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장희빈이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극의 권력에 대한 인식는 선악구도의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식이 그런 것과 실제로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뉘앙스는 다르다. 이 사극은 지금껏 선악구도(운명적으로 선인 동이와 그 반대인 장희빈)를 전면에 내세웠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는 뼛속까지 악역이고 서인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심운택(김동윤)은 늘 선이다. 그들은 결국 권력을 향해 달려간 두 인물일 뿐이지만.
'선덕여왕'의 미실이 악역이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사극이 선악구도를 그리기보다는 보다 권력의 관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덕만(이요원)과 대립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멘토 같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권력의 법칙을 잘 이해했고 그래서 미실이 최후를 맞이할 때 덕만 또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덕만이 여왕의 자리로 등극한 이후에 심지어 미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부재를 깊이 느낄 만큼, 사극은 선악구도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관계의 다이내믹함(끝없이 변화하는 힘의 움직임)을 잘 잡아냈다. 반면 '동이'의 대립구도는 지나치게 선악구도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이 권력의 시스템이 그 구도 아래 가려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과연 이 사극처럼 동이가 장희빈을 내쫓고 나면 시스템은 달라질까. 해피엔딩은 올 것인가.
장희빈은 그래서 미실만큼 매력이 없다. 이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다.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다. 역사에서 정치의 상층부로 올라갔던 여성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에서 장희빈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반면, 미실이 꽤나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희빈하면 우리는 그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명연기와 억지로 사약을 받는 그 체통도 우아함도 잃은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변적인 관심들은 어쩌면 이 공고한 시스템을 가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선악의 문제라고 강변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악구도의 변화는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한때 이 악녀로 그려졌던 장희빈에게 열광하던 시대가 가고, 이제 그 단순함에 별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권력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 또한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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