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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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은 왜 카프카식 우화처럼 읽힐까

D.H.Jung 2011. 2. 1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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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봉우리 우화가 환기시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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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것은 하나의 우화다. 높이 90미터의 스키점프대 꼭대기에 깃발이 하나 꽂혀 있고, ‘무한도전’ 멤버들 전원은 그 경사를 올라가야 된다. 지금껏 ‘무한도전’이 제시했던 미션들과 비교해보면 지극히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미션의 과정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왜? 그 과정이 자꾸만 다른 현실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한도전’의 이 단순한 미션과정을 보며 느낀 감동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르는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을 오르는 이들은 천차만별이다. 다리 부상으로 미션에 참가하지 못한 정형돈은 말 그대로 ‘성대투혼’의 응원을 벌여주고, 유재석은 그 특유의 체력과 순발력으로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다. 하하와 노홍철이 가까스로 정상에 오르지만 거구의 정준하와 나이 많은 박명수는 자꾸만 밑으로 미끄러진다. 그건 꼭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는 것만 같다.

결국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 유재석이 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정준하에 이어 박명수를 끌어올린다. 도무지 오르지 못할 것 같아 거의 포기상태에 이른 길에게 유재석은 아이젠을 풀어주고 그래도 오르지 못하자 심지어 줄을 놓고 맨 밑으로 다시 내려간다. 다시 올라와 뒤에서 길을 밀어주기 위함이다. 미안해하는 길에게 “포기만 하지 마라”는 유재석은 결국 길과 함께 동료들이 끌어주는 줄을 잡고 다시 정상에 오른다.

마침 배경음악으로 깔린 이적의 ‘같이 걸을까’는 이 우화 같은 장면에 울림을 더해준다.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이 노래가 전해주는 ‘같이’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같이 오르고 또 오르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훈훈한 장면들과 어우러졌다.

이 우화가 환기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병과 배고픔에 ‘남은 밥’이라도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떠난 고 최고은 작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고 이진원씨가 떠오르는 건? 지금도 장벽처럼 놓인 사회로의 좁은 통로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이 생각나는 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대우를 생계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노동자들이 아른거리는 건? 도대체 왜일까. 이 ‘무한도전’이라는 우화의 세계 속에 찍혀지던 ‘우린 원래 평균이하이니까’라는 자막이 못내 눈에 밟히는 이유는?

물론 ‘무한도전’이 의도적으로 이런 우화를 그려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웃음을 전제로 우연히 해보자던 미션에서 갑자기 피어난 웃음기 사라진 감동적인 이야기는 결코 연출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발 상황 속에서 피어난 멤버들의 동료애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프로정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이런 비의도적인 장면들이 가끔 우화처럼 그려지고 사회적 현실을 떠올리게 하며 그로 인해 우리 가슴을 파고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무한도전’만의 심지어 카프카적인 색채가 돋보인다.

가상의 설정이나 놀이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리얼한 멤버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방식은, 완전히 가상의 세계처럼 보이면서도 보는 이마다의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카프카식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게 가능한 것은 그 가상의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거는 멤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은 그렇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는 우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우화는 현실에 닿아있어 우리의 마음을 속절없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