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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