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거미줄 하나로 세상과 맞선 거미, 샬롯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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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하나로 세상과 맞선 거미, 샬롯

D.H.Jung 2007. 2. 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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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미줄의 두 가지 용도, 밥벌이와 창조
웰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샬롯이듯, 또한 샬롯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웰버다. 웰버가 나타나기 전까지 샬롯이 하는 일이라곤 거미줄을 치고 포획된 먹이에서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농장의 동물들은 그런 샬롯을 두려워하고 역겨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의 눈길을 던져준 것은 웰버. 웰버의 출연은 샬롯의 삶을 바꿔놓는다.

햄이 될 비천한 운명의 소유자 웰버를 위해 샬롯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 한다. 그 동안 먹고살기 위해만 쓰던 거미줄을 한 생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샬롯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부합한다. 웰버가 식용이 되지 않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즉 이 샬롯의 선택은 자신이 살아온 ‘그저 먹고사는 삶’의 부정인 동시에, 생산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세태와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네 글쟁이들의 선택과 거기서 오는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려 선택한 길에서 결국 밥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글쟁이들도 자기의 거미줄을 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먹고살기 위해 쓰는 글과 가치창조를 위해 쓰는 글. 샬롯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줄의 거미줄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초상이다.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 기적을 바라지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글은 사실 무력해 보인다. 더욱이 글보다는 돈의 가치를 더 맹신하는 사회 속에서는 글 자체도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애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만만한 글쟁이들의 초심은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샬롯이 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밤, 농장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글자를 만든다. 그것으로 저 생산성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겠다는 것.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거미줄에 새긴 글자는 ‘Some pig(멋진 돼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구간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은 웰버를 앞에 놓고 연실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관심으로 웰버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잠시 뿐,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장의 동물들이 모여 밤새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나온 글자가 ‘Terrific(굉장하다)’. 그리고 기적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회에 나간 웰버를 위해 마지막으로 ‘Humble(겸손하다)’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다.

여기서 이 세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멋지다’, ‘굉장하다’와 같은 자기 자랑형 문구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겸손하다’와 같은 자신을 낮추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겸손’같은 가치마저도 하나의 홍보성 문구로 활용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웰버를 위해 샬롯이 쓴 ‘겸손하다’는 결코 홍보성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글자였는데 그 증거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샬롯이 쓴 문구를 보며 웰버가 말한다. “그런데 내가 저 멋진 표현에 어울리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샬롯이 말한다. “바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너한테 딱 어울리는 표현이야.”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원
그런데 이런 샬롯의 노력으로 웰버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웰버의 소원은 겨울까지 살아남아 첫눈을 보는 것. 그러니 그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그런데 그 생존을 막는 요인은 욕망이다. 돼지 한 마리에게는 생존인 것이 그 돼지로 만든 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화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돼지를 그저 진짜 돼지로 읽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돼지와 거미와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과 동일선상의 가치로서 생명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웰버라는 돼지로 상징되는 비천한 존재와 그를 비천하게도 만들고 특별하게도 만드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존과 욕망 사이에 서서 한 돼지의 가치를 비천함에서 특별함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거미의 노력은 이 세계의 총체적인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좀더 섬뜩한 현실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아이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생긴다. 오히려 ‘샬롯의 거미줄’은 우화라는 아이들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는 영화라 할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영화관에서 아이가 볼까 숨기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리가 있을까. 그저 글쟁이가 동병상련식으로 느끼는 감정과잉이라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이 영화 속에는 있다.(www.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