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흥행만을 노린 기획영화들 때문이다. 물론 조폭영화라는 용어 속에는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있다.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느와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 역시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조폭이라는 소재에 연연하는 것일까. 혹시 조폭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표상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우아한 세계’에 이르러 추정되는 결론은 조폭은 이제 그저 칼부림에 쌍스러운 욕이나 하는 그런 표피적인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 함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이다.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게임의 법칙(1994)’,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로 귀결되는 초창기 조폭영화들은 조폭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에둘러 고발했다. 철저히 조폭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벌이는 게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에 대한 문제. 정답은 시스템을 만들고 법칙을 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넘버3가 넘버2나 넘버1이 되려고 해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이들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폭의 세계가 갖는 단순명쾌한 폭력으로 그 아래 숨겨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시스템을 목격한다는 것은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친구(2001)’는 이런 현실에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그 시절의 친구를, 이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런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성공의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그 시스템의 벽에 무너지는 우리네 가장의 모습들이다.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
하지만 초창기 조폭영화가 가진 이러한 풍자 내지는 사회비판의 요소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조폭 코미디물로 인해 퇴색된다. ‘조폭마누라’나 ‘두사부일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명절 극장가를 달구었다. 조폭영화가 가진 현실적 함의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공중에 붕 떠버린다. ‘또 조폭영화냐’라는 비판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재는 2006년 개봉된 ‘비열한 거리(2006)’를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진다.
‘비열한 거리’는 똑같이 초창기 조폭영화에서 다루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좀더 생활기반으로 조폭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과거 조폭의 모습은 조폭 세계 속에서의 비장한 인물로만 그려졌지만, ‘비열한 거리’에 와서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더 리얼해지고 사회적인 함의는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집안에서는 가족이 살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의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병두(조인성)는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이 갖는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
수직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또한 그 가장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수평적인 세계이다. 병두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누군가를 밟고 서야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질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수평적인 세계의 안정을 위해 수직적인 세계로 올라가려는 가장들의 희망은 시스템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아한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바로 가장들이 갖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며, 가족이란 안전망과 사회라는 현실 싸움터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살려는 강인구(송강호)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저 현실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적 가장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졌듯이 시스템은 절대로 희생 없는 대가를 주지 않는데, 우리네 가장들은 그 시스템에서의 성공을 통해 가족들과의 ‘우아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또다시 조폭의 세계를 들고 온 이유이자, 조폭이 이 시대의 가장이 된 사연이다.
'옛글들 > 영화로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 ‘아버지 영화’를 뛰어넘다 (0) | 2007.05.05 |
---|---|
소리와 만나 영원이 된 길,‘천년학’ (0) | 2007.04.14 |
수컷의 향기, ‘수’가 남긴 아쉬움 (0) | 2007.03.26 |
역사를 꿰뚫는 영화라는 창, ‘300’ (0) | 2007.03.20 |
코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살인자, ‘향수 (0) | 2007.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