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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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잘려진 꼬리를 찾아서

D.H.Jung 2006. 5. 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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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저주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상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안전했던 경계를 포기하고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포기했기에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랑은 상처를 전제로 한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래서 꿈꾼다. 저 멀리 있는 저 별에, 사라진 내 님이 살고 있다고.

저주받은 인간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우리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른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된다.

<도마뱀>은 바로 그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노란 우비를 보호막처럼 입고 다니는 저 맹랑한 아이, 아리가 저 스스로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은 인간’의 운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보호막 치기, 혹은 경계 긋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아리는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친다. 노란 우비가 그렇고 입만 열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그렇다.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보호막 치기이다.

그런데 그런 아리의 보호막을 넘어오는 소년이 있다. 조강.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그는 아리의 ‘조강지부’같은 인물이다. 노란 우비를 넘어서 살갗을 마주 대고, 아리의 거짓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바닥에 그어놓은 금을 어느새 넘어버린다.

그러자 자신을 보호하려던 아리의 보호막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조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가 된다. 금 하나를 넘어오는 그 순간,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버리는 도마뱀처럼 그녀는 종적을 감춘다. 그녀가 느끼는 위협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이 조강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며,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조강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몸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잘랐던 도마뱀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

죽음을 앞둔 연인, 별을 꿈꾸다
경계를 확실히 긋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리는 외계인이 된다. 외계에서 왔으니 저 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거짓말은 그러나 이제 다 큰 조강이 믿기엔 너무나 허황된 것이다. 하지만 절박한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저 별에 잠시 먼저 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아픈 아리를 위해 미스테리 서클을 그리며 UFO를 부르는 조강의 마음 속에는 꼿꼿이 세워진 아리의 가시까지 껴안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UFO가 나타난들 대수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을 만나기도 하고, 들꽃으로 별로 다시 살아난 연인을 만나기도 하지 않는가. UFO와 우주인은 이 시대의 들꽃이며 별이고 유령이다.

멜로인가, 미스테리인가
영화는 강혜정, 조승우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번뜩이지만 유기적인 구성은 조금 산만한 편이다. 황인호씨의 원작, <아리조강 납치사건>과 <도마뱀>을 비교해보면 감독은 약간은 만화적인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그 만화적 색채를 최대한 줄이고 영화적인 공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리조강 납치사건>은 저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납치사건>처럼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멜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공감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그럴 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도마뱀>에 와서 그런 색채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굳이 붙이자면 ‘미스테리 멜로’를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공감은 단순히 남녀간 사랑의 이야기나 최루성 신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다 깊은 공감을 만들려면 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이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이나 존재 같은 깊은 통찰력이 깔려 있어야 했다.

<도마뱀>은 좋은 소재에 좋은 아이디어에 훌륭한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영화의 틀을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도마뱀’이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그런 깊은 울림까지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와 멜로가 만나 휴먼 드라마로 연결됐더라면 오래두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기존 멜로 영화들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모범답안 같은 연출을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인 우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도마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도마뱀은 번번이 꼬리를 잘라왔다. 영화 <도마뱀>은 우리 생애에서 자르고 도망쳤던, 그래서 기억 속에 서서히 버려진 그 꼬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혹은 그렇게 영원히 잘라내려 했지만 계속 돋아나기만 하는 꼬리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