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곽원갑> 그 몸이 말해주는 것들
앙상한 체구의 달라이 라마는 성지순례를 온 비구니들과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라는 것은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갖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지요.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우연히 TV에서 보게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연걸은 2005년 10월 그의 아내 리지와 함께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다럄살라를 방문했다. 10여년 전 불교에 귀의한 그에게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테러가 화두가 된 세상 속의 아름다운 몸
액션과 폭력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몸은 하나의 무기로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몸은 폭탄을 장착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몸은 무고한 기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한다. 어떤 몸은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로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어떤 몸은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올림픽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우리들의 추악한 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 이제 곧 개봉할 워쇼스키 형제의 <브이 포 벤데타>,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 모두 이 추악한 몸이 벌이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영화들이다. 9.11 테러가 이제 그 의미를 찾는 시점이 다가오자 영화들은 일제히 테러리즘에 대한 자아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동양에 이연걸이 있다. 그는 내한 인터뷰 기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에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인 곽원갑>이 단순한 이소룡류의 격투기나, 성룡류의 오리엔탈 롤러코스터, 혹은 서극류의 환타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펼쳐보인다. 몸은 잘못이 없다. 문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몸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몸은 더이상 추악한 무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 무엇이 된다.
진정한 무도가 완성된 그 후
최고의 무술인이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무기로 변해 라이벌인 진대인을 죽이고 만다. 폭력의 시작은 끝이 처참하다. 진대인의 제자는 곽원갑의 노모와 어린 딸을 살해한다. 눈이 뒤집힌 곽원갑은 칼을 들고 진대인의 집을 찾아간다. 진대인의 시신이 놓여진 곳 옆에서 진대인의 아내와 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곽원갑은 칼을 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곽원갑은 자신의 딸과 노모의 모습을 진대인 아내와 딸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시의 신뢰(사랑하는 딸과 노모를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와 동시에 존중(진대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 생겨난 것이다.
1인자가 되는 순간에 곽원갑은 나락의 길을 걷는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맹인소녀 문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진정한 무인의 길을 깨닫게 된다. 무기가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앞못보는 맹인소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곽원갑은 고향으로 돌아와 진대인의 아내와 딸을 찾아 사죄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강한 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처하는 동양적인 대안을 제시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성된 무인은 시대적 소명을 갖게 되고, 서구열강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영웅이 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정당한 것인가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 중국이나 반드시 이겨야할 대상이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건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은 본래 아니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곽원갑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적 장치들은 되어있다. 상대편 일본선수가 곽원갑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저 <바람의 파이터>에서 기대했던 진정한 무도의 길의 모습이 점차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변해갔던 그 장면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에서 말하는 ‘국가라는 이름 하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연쇄폭력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그 몸을 갖게 되면 추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무인 곽원갑>이 넘지 못한 선은 바로 이 액션영화로의 귀의에 있다. 그가 이 영화를 ‘한 무인의 삶을 통한 사회적인 드라마’로 일컫지 않고 ‘마지막 액션영화’로 소개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연걸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폭력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아닌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오는 몸의 계보학
냉전시대에 탄생한 중국무술영화의 영웅, 이소룡의 몸은 파괴적이다. 적과의 대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느냐가 그의 몸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그러다 우리는 성룡이라는 괴짜 무술인, 변칙 무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냉전을 비웃듯이 몸을 희화화시킨다. 똑같이 살상을 목표로 하지만 동작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웃기지 않니? 이 몸이 말야.’ 성룡의 액션은 점차 체조화되고 무용화되어간다.
그리고 이연걸이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무술이면서도 몸의 예술, 무용이었다. 무술영화가 그 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 동작의 무용적인 특성에 있다. 아름다운 몸의 동작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은 이 무용을 하는 듯한 몸을 폭력과 연결시켜 미학화한다. 느와르의 탄생이다.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모두 이 몸의 느와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많은 액션영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차용해 폭력적인 장면,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다. 멋진 동작 하나를 보면서 우리는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몸이 무기가 된 이유이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라
성찰은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종교에 대한 성찰은 우리 몸을 아름답게 한다. 이연걸은 이제 그 몸의 차원을 보다 내적인 곳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는 이제 나이들었고, 찍을만큼 많이 액션영화도 찍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자. 그 몸을 폭력으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과, 그 몸을 전장으로 내모는 국가적인 폭력을 탓하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몸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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