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따뜻함으로 채운 인물들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에는 캐릭터가 아닌 사람들이 보인다. 드라마에서 스토리를 극화하기 위해 캐릭터들은 어떤 한 부분이 극대화되어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천사표 캐릭터는 한없이 천사가 되고, 악역은 한없이 악역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 우리가 흔히 ‘진부한 선악구도’라고 말하는 설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선악구도를 의도했다기보다는 드라마라는 또 하나의 세계 속에 스스로 움직이는(작가들은 어느 순간부터 저 스스로 인물들이 움직인다고 한다) 인물들을 드라마의 극적 구도라는 명목으로 억압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맙습니다’는 살아있는 인물들이 꿈틀대는 드라마이다. ‘악역 없는 드라마’는 극중 인물을 어느 캐릭터로 규정되는 한 측면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인물들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어떨 때는 천사가 되고 어떨 때는 악역이 되는 살아있는 성격을 구축해 그 안에 저 스스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고맙습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렇다.
강한 모성애를 가진 미혼모, 영신
영신(공효진)은 어딘지 답답한 구석이 있는 미혼모이다. 자신에게 섬을 떠나라고 하고, 또 이상한 남자를 소개시켜주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석현모(강부자)는 분명한 가해자지만 그런 그녀에게 영신은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봄이(서신애)와 미스터리(신구)를 위해서는 한없이 강해지는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강력한 모성애다. 몸살을 앓으면서도 가출한 딸을 찾아 나선 영신이 꾸역꾸역 밥을 먹는 장면이 공감을 주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제 정신을 차린 영신이 옷과 신발을 새로 사 신고 민기서 앞에 나와 “이제 봄이 엄마 같아요?”라고 묻는 대사는 그녀의 모성애를 강하게 드러낸다.
미혼모가 강한 모성애를 보여준다는 설정은 영신이란 인물을 살아있게 만든다. 모성애가 부여되자 그녀는 미혼모라는 굴레 속에 갇히지도 않고 또 그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 인물이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강한 모성애로서의 그녀를 그저 긍정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모성애는 때론 자신을 부정하는 희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 그녀는 “전 여자가 아니에요. 봄이 엄마일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삶에 의미가 없지만 생명을 살리는 의사, 민기서
반쯤 감은 눈이 초점을 허공에 두고 읊조리듯 말하는 민기서라는 인물은 까칠함의 대명사이지만 그 까칠함은 종종 따뜻한 마음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된다. 이 인물 속에는 유달리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환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가 선택한 안락사로 인해 당한 가족의 고통을 옆에서 본 민기서로서는 환자는 환자일 뿐이라는 냉정함으로 의사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그것을 깨준 것은 차지민(최강희)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환자이자 자신의 연인이었던 것. 이로써 그의 마음 속에는 환자에 대한 냉정과 열정이 공존하게 된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절대로 의사 짓 안 하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푸른도로 들어오면서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삶을 포기한 듯한 민기서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다는 설정은 아이러니다. 영신의 집에 하숙하는 그가 저 자신은 대충 살아가면서도 곤경에 처한 영신네 가족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를 부정하고 아이를 그리워하는 석현
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석현(신성록)은 그 사실을 부정한다. 민기서의 “넌 도대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기서는 그런 자신이 당황스럽고 미워진다. 지나가는 아이와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 거기에 봄이와 자신을 끼워 넣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의 그가 가진 것들이 아이를 인정하고 영신을 맞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석현이 사장이자 민기서의 어머니인 강혜정(홍여진)에게 찾아가 푸른도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겠다며 그 이유로 “다 시시하고 무의미해졌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강혜정의 말대로 민기서가 푸른도 보건소에서 일하겠다면 떠날 때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 비즈니스 자체를 시작한 그가 그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는 상황은 그간에 석현이란 인물 속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는 석현을 통해 엘리트의 전형처럼 보이는 인물 속에도 남겨져 있는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이밖에도 이 드라마 속에서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이 많다. 보건소 의사인 오종수(류승수)는 돌팔이로 매도되면서 자학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지만 푸른도에서 봄이로 촉발된 에이즈에 대한 편견 앞에 온몸을 던지는 능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늘 영신네 집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석현모는 봄이의 에이즈가 잘만 관리하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에 패물을 끄집어내며 “일단 살리고 봐야된다”고 말한다. 욕심과 소유욕에만 불타던 박씨(김하균)는 봄이를 껴안고 자신보다 오래 살아달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들이 한 인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은 그 인물을 보는 시선이 아이의 그것처럼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봄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에 난리법석인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아무런 편견이 없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에이즈라는 병은 그저 병일 뿐, 질시와 배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마치 에이즈라는 병에 걸린 듯 위협적으로 혹은 배타적으로 보이는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아이의 시선으로 보여지면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 바로 따뜻한 인간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미혼모지만 모성애가 강한 것이 아니라 미혼모이기 때문에 모성애가 강해진 것이고, 삶의 의미가 없으면서도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삶의 의미가 없어진 연후에야 오히려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며, 아이를 부정한 후에야 아이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영신네 가족이 가진 온갖 부족함은 작가의 시선으로는 가능성이다. 그 부족함을 따뜻하게 채워줄 많은 살아있는 인물들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란 제목은 바로 그 부족함을 채워준 인물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인사이자, 부족하기에 꽃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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