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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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대중문화 속 가족은 변화 중

D.H.Jung 2007. 5. 28.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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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되는 가족, 거기서 보는 희망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웃음폭탄의 주재료로 다루는 건 ‘이 시대의 가족’이다. 그것이 웃음을 주는 이유는 한 집안에서 살고는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파편화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간의 과장된 대결구도는 재미의 한 요소로 끄집어 내진다. 박해미와 민용은 여러 차례 복수와 보복을 거듭하며, 나문희는 며느리인 박해미와 내적인 갈등 상황을 연출한다. 부자지간이지만 아버지인 이순재는 아들인 준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 윤호와 민호는 앙숙지간이다.

이렇게 질서(?)를 잃고 대결로 치닫는 가족관계는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와 달라진 가족구성원들의 역할 내지는 권력구도에서 비롯된다. 권위적인 아버지상의 아이콘이었던 대발이 아빠 이순재는 ‘야동순재’로 불리며 한층 낮아진 눈높이의 아버지상을 그려낸다. 게다가 아버지의 계보를 이어받는 준하는 이 시대가 만든 무능력한 아버지의 전형이다. 그러자 과거 아버지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된다. 대신 가족의 중심으로 서는 인물은 능력 있는 며느리로 표상되는 박해미다. 한 가족 속으로 들어온 며느리라는 이름의 새 구성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혈연으로 묶인 가족체계는 느슨해지면서 좀더 수평적인 구조로 재편된다.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 속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의 처지 때문이다. 최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시대 남성들이 처한 문제를 포착한다. 가장이란 이름으로 칼과 피가 튀는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세계’라는 진창에서 뒹구는 것이다.

이런 조직사회의 어려움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 속에서 장준혁(김명민)이란 캐릭터를 통해 극명하게 그려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파멸된 자신이라는 것은 이 시대 가장이란 이름으로 조직생활에 몸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여성들 전문직으로 나아가다
반면 대중문화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과거 남성들이 차지했던 그 권력의 자리에 앉혀진다. MBC 드라마 ‘히트’의 강력반 반장이 여성인 차수경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드라마는 작가가 밝혔듯이 형사물 이면에 ‘히트’라는 강력반으로 대변되는 유사가족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장점과 함께 단점을 가진 남정네들을 이끄는 인물은 차수경이란 여성이다. ‘히트’의 차수경처럼 TV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여필종부하는 여성들이 아니다. 심지어는 사극에서조차(예를 들면 황진이나 ‘주몽’의 소서노 같은) 여성들은 남성들을 휘어잡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남성이란 존재는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불륜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여성들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된다.

대중문화 속에 전문직 종사자로서 등장하는 여성상은 이제 오로지 결혼에만 목매는 트렌디한 성격으로 그려져서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저 스스로 독립적이며(마녀유희), 즐길 줄 아는 존재(로맨스 헌터)로 공감을 얻는다. 가족을 구성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 같은 여성들의 변화는 가족 그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동인이다.

각자 살아가는, 하지만 버릴 순 없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이렇게 변화된 가족의 모습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제목이 제시하는 중의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좋지 아니한가’는 ‘좋지 아니한 가(家)’, 즉 안 좋은 가족이란 의미와,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문장 그대로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관계는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은 저 ‘바람난 가족’에서 고개를 들더니 ‘가족의 탄생’에서 어떤 화해의 모습을 띄다가 ‘좋지 아니한가’에 와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이란 의미로서 그 가족은 좋지 않은 가족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비춰주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는 가족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걸어가는 삶 속에서 그저 묵묵히 옆을 돌아다보면 거기 늘 안길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족은, 과거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생되고 억압됐던 가족 구성원들을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다시 그런 가족이라면 ‘좋지 아니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좋지 아니한가’처럼 이 시대에 가족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살기 어려워진 사회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존재로서의 가족이며 또 하나는 수평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해체되는 양상으로 해석되는 가족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되는 것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서 가족관계는 변화를 요구한다. 명령하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하고, 직접 변화를 주려하기보다는 묵묵히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새로운 공존의 방법이 모색된다면, 좋지 않아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또한 좋지 아니한가’ 하고 긍정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