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수>가 그토록 잔인해졌던 까닭
<신의 한수>는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다. 사실 바둑을 대중적인 소재로 만든 건 만화다.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타 다케시의 <고스트 바둑왕>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작품으로는 <이끼>를 그린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 있다. 바둑이라는 소재가 주로 만화에서 빛을 본 것은 이 게임이 결코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다루면 바둑이 가진 그 신묘한 세계의 재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진출처: 영화 '신의 한수'
만화처럼 책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장르라면 바둑의 좀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고, 만화의 특성상 판타지적인(우리가 흔히 만화 같다고 말하는) 요소들을 덧붙여 그 어려움과 복잡함을 상쇄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사실 대략난감이다. 바둑의 그 셀 수 없이 많은 수들을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렇게 영화를 풀어나가다가는 지독히 마니아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재미없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신의 한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둑이 소재지만 바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전략. 따라서 영화는 바둑의 한 수 한 수가 가진 의미를 짚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한 수가 가진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한 수로 인해 생겨나는 끔찍한 결과에 의해서다. 첫 도입부에서 태석(정우성)은 형의 목숨이 달린 도박 바둑을 두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바둑알을 떨어뜨려 악수를 두게 된다. 그런데 그게 왜 악수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태석의 한 수만 물러달라는 처절한 애원이 그 수가 악수임을 얘기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끔찍한 폭력이다. <신의 한수>는 그래서 살수(이범수)라는 강력한 폭력의 공포를 기반으로 해서 바둑이라는 낯선 소재를 끌어안는다. 이제 남는 건 바둑의 신묘한 세계가 아니라 그 대결에서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끔찍한 결과의 차이다. 이기면 몇 십억을 순식간에 벌 수 있고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신의 한수>가 찌르고 자르고 때리는 그토록 폭력적인 장면들을 반복해서 심어놓은 건 낯선 바둑이라는 과정을 간단명료한 폭력의 결과로 상쇄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것은 바둑이라는 ‘신선놀음’을 일종의 복볼복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알다시피 복불복이란 복잡한 게임의 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중요한 건 그 게임의 결과로 빚어질 극과 극의 상황이다. 그 결과의 파장이 크면 클수록 단순한 복불복 게임의 몰입도는 커진다. 이렇게 되면 바둑이라는 소재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가위바위보 복불복에서 중요한 건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홀짝으로 복불복을 해도 그 게임의 묘미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낯선 바둑의 세계는 대중을 상대로 하게 되면서 대신 폭력이라는 복불복 게임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과도한 폭력에의 집중은 오히려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는다. <신의 한수>는 태석이 살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팀을 짜고 하나씩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게임 미션 같은(바둑을 두는 수순을 형식으로 채용하고 있다) 형식을 보여 주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느낌은 어쩌면 당연히 묻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현실감은 갖춰져야 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데도 불구하고 형사나 경찰 하나 등장하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결코 작지 않은 오류다.
바둑을 소재로 하지만 정작 바둑의 세계는 보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경찰과 형사 같은 공권력은 삭제되어 있는 세계. 그러니 이 비현실적 공간에 남는 것은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멋진 액션 동작들뿐이다. 마치 <아저씨>의 액션을 보는 듯한 깔끔한 동작들은 특히 그것을 더 멋스럽게 만드는 정우성과 잘 어우러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정우성의 겉면만 살짝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액션이 잘 어울리는 정우성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의 내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만화 같은 영화라도 형이 죽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다면 그만한 내적 갈등이나 분노, 증오심이 묻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 상황을 그저 미션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저씨>의 액션이 힘을 발휘했던 건 그 원빈이 날리는 주먹에 내면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한수>의 정우성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정우성을 그저 잘 생기고 액션이 멋진 배우로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의 한수>로 정우성을 캐스팅했다면 그 외면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의 내면을 보여줘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이 영화가 상업적인 선택을 한 결과일 것이다. 복잡한 내면보다는 보여지는 쾌감을 선택한 것. 하지만 바로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인물의 내면이 폭력과 액션의 근거와 쾌감을 오히려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 <신의 한수>에 부족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옛글들 > 영화로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행돌풍 '군도'에 대한 반응 왜 양극단으로 나뉠까 (10) | 2014.07.25 |
---|---|
변칙 개봉 '혹성탈출', 공존을 얘기하는 영화라니.. (0) | 2014.07.13 |
'트랜스포머4'로 보이는 '어벤져스2' 서울로케 (0) | 2014.07.02 |
'엑스맨' 전체를 말해주는 퀵 실버의 짧은 액션 (0) | 2014.05.26 |
'인간중독'의 '색계'와는 닮은 듯 다른 매력 (0) | 2014.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