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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세상은 안 변해”, '펀치'의 지독한 허무가 주는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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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김래원의 지독한 허무주의에 공감하는 까닭

 

그러니까 이걸로 너 나오게 할 거야. 하경아 세상 안 바뀌어. 너부터 살아.” <펀치>의 박정환(김래원)이 전 처인 신하경(김아중)에게 건네는 이 말 속에는 세상에 대한 지독한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세진자동차를 부도내 해고노동자 열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10조 원의 현금을 외부로 유출하고 단 한 푼도 갚지 않은 김상민 회장(정동환)과 그와 공조한 이태섭 대표(이기영), 이태준 총장(조재현)을 한꺼번에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진술서. 그 진술서를 받아내고도 박정환은 그들을 처벌하기보다 딸 예린(김지영)이의 엄마 신하경을 풀려나기 위한 카드로 그 진술서를 활용한다.

 

'펀치(사진출처:SBS)'

박정환에게 있어 세상의 현실이란 정글이다. 누구 한 사람의 비리를 파헤치고 그에게 법적인 처벌을 받게 한다고 해도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잡으면 딴 놈이 그 자리 앉을 거야. 똑같은 놈이거나 더 한 놈이.”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어찌 보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춰봤을 때 당연한 일이다. 박정환이 처한 상황을 보라. 그가 뇌수술을 받다 깨어나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에 그와 평생을 같이할 것 같던 이태준은 그를 버렸다. 그리고 그가 빈 자리를 그의 숙적인 조강재(박혁권)가 차지했다.

 

반면 윤지숙(최명길) 장관과 정반대 위치에 서 있던 박정환은 이제 그녀의 편에 서서 이태준과 대결을 벌이는 입장이 됐다.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말 그대로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수밖에 없는 생존경쟁의 정글이다. 그러니 박정환에게 세상은 바뀌지 않는 허무의 공간이다. 그가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는 신하경을 기다리며 딸 예린과 진술서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장면은 그래서 기묘한 허무와 공감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지켜야할 건 내 가족밖에 없는 세상. 그 세상에 대한 지독한 허무주의다.

 

유일하게 그가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권력을 갖겠다는 그 야망이었으나 이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이상 그런 야망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대신 그를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예린이와의 약속이다. 엄마를 보호해주겠다는 약속. 그래서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약속. 그것을 위해서는 진흙탕 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그 모습에서 발견되는 건 우리네 가장들의 얼굴이다. 나아질 전망도 없는 지독한 정글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 가족을 지켜내려는 가장들의 몸부림.

 

그런 세상에 대해 신하경은 조금 다른 생각을 말한다. 그녀는 이 정글이 앞으로 딸 예린이가 살아갈 세상이라고 말한다. 예린이에게는 집에서 위인전을 읽어줄 엄마가 필요하다는 박정환의 말에 그녀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위인들은 살았어도 예린아 너는 그러면 안돼 그럴까?”하고 반문한다. “조금만 앞으로 가자고 애원한다.

 

신하경의 이상과 박정환의 현실. <펀치>는 어찌 보면 이 두 상반된 입장의 대결처럼 보인다. 물론 이 드라마는 막연한 이상의 판타지를 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지독한 현실 속에서 허무주의의 늪에 매몰되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환이 보여주는 지독한 허무주의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네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인물 몇몇 바뀐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입장의 부딪침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그 귀결점으로서 예린이라는 그들 공통의 미래가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박정환은 이 지독한 허무주의를 넘어서 무언가 현실의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펀치>가 주는 흥미진진함은 바로 이 허무주의에 공감하게 되는 현실과 대결하는 드라마의 날선 의식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