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 왜 굳이 박신혜와 진경을 대립시켰을까
과거 공장에서 커다란 화재사건이 벌어졌고 구조작업을 위해 소방관들이 투입되었지만 폭발사고로 모두 사망했다. 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었지만 언론의 방향은 이상하게도 구조작업에 투입시킨 소방관 대장 기호상(정인기)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루머는 기호상과 그의 가족들을 순식간에 희생양으로 몰았고 사고의 원인 따위는 잊혀지게 만들었다.
'피노키오(사진출처:SBS)'
그리고 13년 후 그 때와 유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벌어져 사망자들이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사건은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그 날 신고를 받고 왔다가 그냥 돌아간 경찰관 안찬수(이주승)의 안전불감증에 집중되었다. 팩트는 없고 추정이 마치 실제처럼 보도되는 과정에서 본말은 전도되고 무고한 이들은 희생양이 되며 그렇게 국민들의 관심사는 엉뚱한 곳으로 집중된다.
<피노키오>는 왜 13년 전의 사고와 유사한 사건이 마치 데자뷰처럼 똑같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굳이 다루고 있는 것일까. 또 그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사실 이런 사건사고의 반복은 우리네 현대사에서는 익숙한 일이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지하철에 화재가 나고 도시가스가 폭발하는 그 사건사고들이 세월이 지나도 다시 재연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작년 세월호 참사는 그 재연의 끝장을 보여주었다.
사고가 터졌을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쏠렸던가. 사고의 원인에 집중하고 그 제대로 된 책임을 묻기 보다는 애꿎은 사안들로 호도되거나 꼬리자르기에 집중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 사고의 반복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른다. <피노키오>는 왜 사건사고가 그렇게 반복되는 것인가를 파고든다. 거기에는 사고에 대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고 그 철저한 책임 추궁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처리하기는커녕 정치적인 목적이나 경제적인 이유를 변명으로 서둘러 덮어버린 것에 원인이 있다.
<피노키오>는 가진 자들이 언론을 활용해 ‘흐름을 바꾸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다룬다. 시간이 흘러도 사건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건사고를 통해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흥미로운 건 이 사건에 대처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이 싸우는 어른들과의 대결구도다. 피노키오 증후군을 갖고 있는 최인하(박신혜) 기자는 부패한 언론인이 엄마 송차옥(진경) 기자와 대결하고, 범조백화점의 2세인 서범조(김영광)는 송차옥 같은 부패 언론인을 이용하는 재벌인 그의 엄마 박로사(김해숙)와 대결한다.
이런 구도로 보면 주인공인 기하명(이종석) 역시 유일하게 남은 보호자였던 그의 형 기재명(윤균상)과 대결구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기재명은 과거 자신의 집을 풍비박산 낸 거짓 증언자들을 처단하는 복수의 칼날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동생 기하명은 그런 법 바깥의 방식이 아니라 법 안에서의 방식으로 정의를 되찾겠다고 설득한다.
송차옥이 부패 언론을 그리고 박로사가 도덕이나 윤리의식 따위는 없이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재벌을 표징한다면 그 피해자였던 기재명은 그 복수의 칼날이 제대로 된 대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곁가지들에게만 드리워지는 사회의 부조리를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기하명은 그런 기재명의 칼날을 거두게 하고 그 방향을 다시 꼬리가 아닌 머리로 집중시키게 한다. 그것은 <피노키오>라는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최인하와 송차옥 그리고 서범조와 박로사의 대결구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들은 가족관계로 얽혀 있을까. 아니 좀 더 정확히 질문하면 어찌 보면 우연의 남발처럼 보이는 무리한 가족관계를 왜 박혜련 작가는 대결구도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단지 편의적인 구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터져 나오는 사건사고들의 타인의 시선이 아닌 가족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제 아무리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송차옥이나 박로사라고 하더라도 자식들이 연루되어 있다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엄마가 친구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피나는 발뒤꿈치의 아픔도 잊고 며칠 째 밤을 새며 사안을 뒤집어보려 안간힘을 쓰는 최인하는 송차옥에게도 눈에 밟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론이 사안을 보도할 때 그 대상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만일 가족이라면 그렇게 허투루 마구 보도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
“우리는 세월호를 도려내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월호를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는다.” 소설가 김훈은 새해 벽두 한 일간지에 낸 특별 기고에 이렇게 썼다. 이미 바닷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듯한 세월호를 새해 벽두에 다시 끌어올린 것이다. 그가 이렇게 세월호 이야기로 새해를 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건을 이대로 덮어두고 제대로 된 진상 조사와 처벌 없이 지나게 되면 또 다른 세월호를 맞이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피노키오>가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이것과 다르지 않다. 반복되는 사건과 반복되는 사안 덮기, 흐름 바꾸기, 꼬리 자르기는 또 다른 반복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만일 그 사건이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일로만 치부된다면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남 일로 치부하던 그 사건이 내 앞에 터진 것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최인하 같은 피노키오 증후군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이길 바란다. 많은 기자들의 딸국질 소리가 들려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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