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흰 옷이든 검은 옷이든 속은 똑같다?
청와대에 들어온 검찰총장 이태준(조재현)과 법무부장관 윤지숙의 옷은 마치 이들의 대립된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검은 옷을 입은 이태준과 하얀 옷을 입은 윤지숙. 이태준은 옷에 빗대 자신들의 상황을 얘기한다. 까만 옷은 뭐가 묻어도 잘 안보이지만 흰 옷은 조금만 묻어도 확 드러난다는 것. 이것은 윤지숙 아들의 병역비리 카드를 쥐고 있는 이태준이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그에 대한 수사를 멈추라는 압력이다.
'펀치(사진출처:SBS)'
그러면서 이태준은 윤지숙에게 은근한 손을 내민다.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다. 충격적인 건 윤지숙이 그 손을 잡는다는 점이다. 흰 옷을 입었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윤지숙이나 이태준이나 마찬가지의 인간이라는 걸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독한 <펀치>의 현실인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퀀스다.
<개그콘서트>의 ‘도찐개찐’이라는 코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만일 “윤지숙과 이태준”이라고 화두를 던지면 “도찐개찐!”이라는 답변이 나올만한. 나쁜 놈과 덜 나쁜 놈. 그 놈이나 그 놈이나 다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세상에 선과 악으로 선명히 나눌 수 있는 경계란 게 있겠냐마는 <펀치>가 그려내는 세상은 악으로만 가득한 암울한 현실을 담고 있다.
검찰총장이 되어 권력을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치우는 이태준(조재현) 검찰총장이 나쁜 놈이라면, ‘청렴한 검찰’을 내세우며 그와 대적하는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 역시 그저 덜 나쁜 놈에 불과할 뿐 ‘선’은 아니라는 것. 결국 그들은 거래를 하고 박정환(김래원)을 희생양으로 삼아 꼬리자르기를 하려 한다.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의 거래. 그래서 생겨나는 희생양. 이것은 어쩌면 <펀치>가 우리네 정치와 사법의 현실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일 것이다. 머리는 늘 살아남는 꼬리 자르기는 무수한 의혹 속에서도 늘 반복되어 나오는 우리네 아픈 현실이 아닌가.
윤지숙의 이중성은 늘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7년 전 병역비리를 수사 중이던 박정환을 갑자기 구속한 건 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윤지숙 자신의 아들이 그 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7년 후, 이태준과 김상민 회장의 유착에 대해 진술을 받아내고도 박정환만을 희생양으로 삼은 그녀는 또 “경제가 어렵다”는 식의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즉 윤지숙의 이중성을 통해 권력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란 사실은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걸 <펀치>는 아프게도 보여준다.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던 정치인들의 이야기들, 비전과 포부는 사실 어쩌면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펀치>의 인물들은 그 욕망의 동기가 진정한 선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와 연결되어 있다.
윤지숙의 이중성은 아들의 병역비리와 연결되어 있고, 이태준의 야망과 복수심은 살인자였지만 자신의 형인 이태섭(이기영)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시한부 삶을 판정받고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박정환의 행보는 그 모든 것이 가족들과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건 정의니 사법 현실이니 하는 거창한 것들이지만 사실은 모두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그들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한다.
“사람은 결국 다 죽어.” 시한부 삶을 판정받은 박정환의 허무는 <펀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이전투구가 덧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좌우로 나뉘고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 서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외치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야망들이 번뜩이는 현실. 그 살풍경한 현실을 <펀치>는 죽음이라는 극단의 설정을 통해 폭로하고 있다. 결국은 도찐개찐인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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