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경성스캔들’, 이것이 퓨전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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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스캔들’, 이것이 퓨전이다

D.H.Jung 2007. 7. 1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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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사랑이 섞인 그 오묘한 맛, ‘경성스캔들’

시대가 달라지면서 입맛도 달라지듯 드라마의 맛도 다양해지고 있다. 비빔밥하면 고추장에 나물, 참기름, 계란프라이를 떠올리던 건 과거지사다. 이제 비빔밥은 새싹, 한치, 날치알 등등 넣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넣어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드라마도 마찬가지. 역사라는 용기에는 퓨전된 상큼한 맛의 현대적 멜로가 복고풍의 아릿한 향수와 섞이고, 감칠맛 나는 설정과 캐릭터 대사들이 양념으로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낸다. 그 정점에 있는 드라마라는 음식은 바로 ‘경성스캔들’이다. 만일 퓨전이 뭔지 알고 싶다면 이 드라마의 맛을 살짝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네가 혁명을 가르쳐 줘 난 사랑을 가르쳐 줄께
“네가 나한테 혁명이 뭔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너한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께.” 급기야 바람둥이 선우완(강지환)이 나여경(한지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들어 있는 단어들이 예사롭지 않다. 혁명과 사랑이라니.

과거라면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을 일제시대라는 배경에 멜로 라인을 퓨전한 이 독특한 비빔밥은 의외로 참 맛이 좋다. 그것이 그냥 새로운 맛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정확하게 맞춰 이뤄낸 퓨전이기에 그 맛이 좋다는 것이다.

혁명과 사랑이 동떨어진 단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상주의가 가진 낭만주의의 속성은 이 두 단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착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럼에도 여기에 간극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일제시대를 다루던 여타의 작품들 속의 사랑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시대의 무게감을 버텨내지 못해 사랑보다는 혁명이 더 앞서있었던 것.

하지만 ‘경성스캔들’은 다르다. 사랑을 다루되 가볍게 건드린다. 그리자 혁명과 사랑은 선우완의 대사처럼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등가의 힘을 갖는다. 마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두 가지 버전처럼 진행된, ‘조마자(조선마지막여자) 모던걸 만들기’와 ‘바람둥이 혁명남 만들기’같은 이 드라마의 핵심 재미 요소는 이런 힘 배분으로 인해 가능했던 시퀀스들이다.

과거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를 버무리다
이러한 ‘경성스캔들’의 시도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시대상을 너무 가볍게 건드려 공감은커녕 반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이 드라마는 신구세대 시청자들이 함께 앉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된다.

일제시대가 주는 과거적 배경에 대한 향수는, 경쾌한 댄스홀의 음악들과 중절모로 대변되는 멋쟁이 신사들, 구어체적인 연극적 대사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유교적 가치를 지닌 캐릭터들이 버무려지면서 만들어진다. 무엇보다도 그 향수의 정수가 되는 것은 이념이다. 지금 같은 이념 없는 시대에, 무언가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의 가벼운 멜로는 만화 같은 장르적 장치들을 활용하면서 젊은 세대들의 감성에 조우한다. 댄스홀이라는 공간에서의 집단댄스 장면은 마치 뮤지컬 같은 기분을 자아내게 만들며, 선우완이 근무하는 지라시 출판사의 세 남자 김탁구(강남길), 신세기(허정민), 왕골(고명환)은 마치 고대희극의 유쾌한 코러스 같은 역할처럼 활용된다.

그리고 이 과거와 현재는 선우완과 나여경이라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멜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즉 선우완은 현재적 가치를, 나여경은 과거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그 두 가치들은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며, 그러기에 그 둘은 서로에게 그 가치를 일깨우는 중이다.

일제시대라는 무거움과 무채색으로 상징되던 시대에, 가벼움과 화려함으로 부활한 혁명과 사랑은 그렇게 이 한 드라마에서 만나게 되었다. 과거를 다루었으되 현재의 가치가 번득이고, 그럼에도 과거의 가치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이어가는 ‘경성스캔들’. 그 퓨전의 맛이 오묘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