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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그들은 왜 엄마이길 포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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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치맛바람, ‘강남엄마 따라잡기’

SBS 월화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왜 굳이 ‘강남엄마’라고 구체적으로 지칭했을까. 제목이 선정적이긴 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강남에 사는 엄마들은 그저 좀 부유한 엄마들이었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신조어처럼 ‘강남엄마’라는 테두리로 구획되진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강남의 엄마들이 다 드라마가 묘사하는 것처럼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휘날리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실재 강남의 엄마들이 그렇지 않다면 전혀 현실성 없는 이 드라마에 요지부동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을 울리는 데가 있다. 왜 그럴까.

그녀가 강남엄마가 되려한 까닭
그것은 ‘강남엄마’라는 지칭이 그럭저럭 이해되는 현 교육의 문제와 여기에 미묘하게 얽혀있는 빈부격차의 문제가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강남이란 지명의 의미는 그저 지시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8학군으로 상징되는 교육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동산 과열현상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강남의 문제만이 아니고 강북 혹은 지방에서도 소위 명문이라는 학교들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강남엄마’는 그런 비뚤어진 교육열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소위 부유층의 특권의식을 가진 엄마들을 표상할 뿐 실제 강남의 엄마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의 ‘강남엄마’가 되기 위해서 현민주(하희라)는 “자식을 위해 미친 년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원조강남엄마’인 윤수미(임성민)의 도발적인 말 때문이다.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란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민주를 더 눈 뒤집히게 만드는 것은 윤수미와 시댁식구들이 보이는 강남으로 대변되는 소위 가진 자의 특권의식이다. “지들이 무슨 수로 여길 와”하는 그녀들의 태도는 현민주로 하여금 진짜 ‘미친 년’처럼 자존심도 뭉개고 수모를 참아가며 강남으로 이사가고 말겠다는 오기를 만든다.

엄마 vs 학습매니저
하지만 이렇게 오기가 생기면서부터 그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의 욕망이 되어버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소위 강남엄마들은 엄마라기보다는 ‘학습매니저’다. 아이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그 일정에 맞춰 차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매니저들. 그래서일까. 드라마 속 아이들은 왠지 엄마들의 도움을 받는다기보다는 엄마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질투에서 비롯됐고, 그러다 차츰 남의 자식과 비교하기 시작했으며, 상대방을 욕하다가 결국 따라하게 됐고, 점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현민주가 겪는 욕망의 역전은 이 시대 엄마들이 엄청난 사교육의 부담 속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민주가 말한 ‘자식을 위해서’라는 변명 속에는, 실은 자신은 돈이 없어 못한 공부 자식은 원 없이 시키겠다는 자신의 욕망이 숨어 있다. 진우의 좋은 엄마였던 현민주는 점점 학습매니저가 되어간다. 현민주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 원조강남엄마라는 윤수미의 상황은 더 비극적이다. 현재 그녀의 존재는 오로지 아이들의 학습매니저로서만 증명된다. 바람 피는 남편조차 아랑곳 않고, 아버지 생일에 아이의 특강을 고집하는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다. 그녀는 한 남자의 여자도 아니고 아이들의 엄마도 아니다.

무엇이 엄마이길 포기하게 만드나
학부모의 이야기와 함께 드라마 한 축의 이야기를 차지하는 서상원(유준상)으로 대변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이 교육과 부의 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명문대 나와서 사립중학교의 선생님 혹은 유명 학원강사가 되어 돈을 벌겠다는 꿈을 꾸는 서상원이란 캐릭터는 결국 강남으로 표상되는 부유층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히 자가 발전되는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교육이 부를 낳고 부는 똑같은 교육조건을 강요하는 순환구조가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명문이 부동산 과열을 낳고 그 부동산 과열로 인한 부가 다시 교육열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 속에서 윤수미 같은 ‘강남엄마’이든 현민주 같은 ‘강남엄마’를 따라잡고 싶은 엄마이든, 아니면 그 가족들이든 모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가 엄마이길 포기하고 학습매너저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아이들이 아이들이길 포기하고 학습기계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강남의 엄마들도 그저 엄마라 불리지 않고 굳이 ‘강남엄마’라 불리는 이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일까. ‘강남엄마 따라잡기’를 보면서 가끔씩 그 치맛바람의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