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한국인의 몸에 열광하는 이유
그의 개그에는 말이 필요 없다. ‘뭔가 보여달라’는 신호에 무대를 내려가려 할 때, 관객들의 박수가 터지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고, 객석은 순식간에 뒤집어진다. 정말 뭔가 보여주고 떠난 고 이주일 선생의 퍼포먼스다. 비실이 배삼룡 선생은 오뉴월 개가 다리 떠는 모양으로 추는 개다리 춤 한 방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고, 비슷한 시기 남철, 남성남 콤비는 일명 왔다리 갔다리 춤으로 전국 짝꿍들의 18번 춤을 만들어놓았다.
숭구리당당 김정렬은 부실한 하체를 문어처럼 흐느적대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을 배꼽 빠지게 했고, ‘영구 없다’의 심형래는 언발란스한 얼굴로 눈을 끔뻑대는 모습이면 충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맹구와 달룡이라는 엄청난 캐릭터를 만들고 사라진, 이창훈은 최근까지도 봉숭아 학당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네 몸 개그는 사실상 우리가 가진 웃음의 핵심이 분명하다. 몸 개그와 대척점에 있던 스탠딩 개그, 토크쇼의 본좌격인 전유성이 아이디어를 냈던 ‘개그콘서트’ 역시 초기에는 말 중심의 개그에서 시작했지만 점차적으로 몸 개그로 변화해왔다.
몸 개그가 저질인가
이제 ‘우격다짐’이나 ‘수다맨’ 같은 1인 스탠딩 개그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반면, 그저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주로 비교대상이 필요하기에 여럿이 출연한다) 우스운 몸 개그는 이제 모든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시커먼스 노래에 맞춰 숏다리라는 몸의 콤플렉스를 드러내면서 웃기는 ‘키컸으면’, 아예 언어를 옹알이로 지워버리고 서커스적인 동작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옹알스’, 국내 최초 실시간 몸짱 프로젝트를 주창하며 찐 살을 빼는 모습 자체로 웃기는 ‘헬스보이’ 같은 것들은 모두 몸을 희화화하는 몸 개그다.
그런데 한때 저질 개그라 손가락질 받기까지 했던 이 몸 개그를 보는 시선이 이율배반적이다.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유치하고 작위적이며 너무 원색적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 그 기저심리에는 아무래도 ‘말이 아닌 몸으로 웃긴다’는 점이 가장 많이 작용했을 터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몸이 갖는 문화를 하위로 생각하는 태도가 남아있다.
몸 개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무한도전’을 보는 시각은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한다. 노홍철이 하체를 벌떡벌떡 튕기며 춤을 추는 순간, 모두 자지러지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바로 자막을 통해 ‘저질 댄스 작렬!’하며 스스로를 저질이라 칭하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걸듯이 ‘몸을 고생시키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웃다가 ‘도대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 지점 말이다. 물론 어떤 건 정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단지 몸으로 웃겼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은 그렇게 저질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몸은 우리의 경쟁력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 ‘몸은 경쟁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타’, ‘점프’ 같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공연이 말이 아닌 몸과 소리를 극대화시킨 ‘논버벌 퍼포먼스(아무런 대사 없이 리듬과 비트로만 구성된 장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금처럼 다문화 지구 공동체 사회에서 몸이 어떠한 말보다 더 훌륭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된다는 걸 말해준다. 모든 퍼포먼스가 인간 공통이 가진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으로 봤을 때, 몸은 말보다 더 앞서있다.
하지만 단지 커뮤니케이션의 이점 때문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가진 몸을 통한 표현의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난타’의 성공은 그저 타악을 부엌의 요리도구를 통해 한다는 아이디어의 성공이 아니라, 사물놀이 등으로 이미 입증된 우리네 타악이 가진 잠재력을 세계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몸짓과 소리로 표현해냈던 데 있다. ‘점프’의 성공은 우리가 가진 전통무술의 역동성을 희극적인 장치와 잘 엮어낸 데 있다.
‘흥한민국’의 저자인 심광현 영상원 교수는 프랙탈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를 흥과 한의 배접으로 풀어내면서 “한류의 성공요인에는 한국인들의 몸놀림과 육성에 내재된 다른 민족에는 없는 프랙탈한 역동성과 변주능력, 즉 ‘끼’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치 초상집을 축제 같은 분위기로 풀어내는, 울면서 웃거나 웃으면서 우는 한과 흥의 문화가 몸이 가진 다채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본산지도 아닌 브레이크 댄스를 가지고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우리네 비보이들의 몸짓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몸 개그가 가진 가능성
혹자는 논버벌 퍼포먼스 같은 예술적인 장르와 저질 개그라 칭하는 몸 개그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성공적인 논버벌 퍼포먼스에서 보여지는 몸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 주는 긴장감에 더해지는 희극성에 있다는 점에서 몸 개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만 거기에는 우리 전통적인 문화가 가진 예술적 가치가 덧붙여진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우리가 몸 개그를 보는 시선은 우리 사회가 비보이를 보는 시선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선은, 세계가 주목하기 전까지 경박한 춤꾼에머물러 있었다. 춤을 춘다는 몸의 행위에 대한 비하적인 관점을 뒤집은 것은, 그런 편견에도(어쩌면 그 편견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춤을 춘 우리네 비보이들의 노력과, 그것을 사심 없이 인정한 외국의 시선들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진 편견들은 종종 이렇게 우리가 찾아내야 할 가치를 외국이 먼저 찾는 아이러니 속에서 깨지곤 한다.
지난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2회 한류 코미디잔치는 우리의 몸 개그가 가진 가능성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관객들에게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몸 개그. 박준형의 ‘무 갈기’와 정종철의 비트박스, 특히 거의 서커스 수준의 몸 개그인 ‘옹알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이것은 모 방송에 출연해 “개그 중에서도 몸 개그가 먹히더라”고 말한 조혜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최근 일본 방송에 출연해 뜨거운 물을 마시고 “아뜨~”하는 포즈와, “스미마셍”을 외치며 무릎을 뒤로 튕겨내는 몸 개그를 선보여 좌중을 쓰러지게 했다.
최근 들어 몸을 활용한 몸 개그는 꾸준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몸 개그에 우리가 저질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식상한 몸 개그에 대한 비판이 아닐는지. 이제 몸 개그도 무조건 저질이라 치부하지말고 그 질적 수준을 따져봐야 할 때다. 혹시 누가 알까. 우리의 몸 개그에 세계가 배꼽을 잡는 그 날이 올지. 어쩌면 이미 그런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뮤지컬 점프 http://www.hijum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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