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왕의 시대 가고 나의 시대 올까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왕의 시대 가고 나의 시대 올까

D.H.Jung 2007. 9. 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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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왕이 아닌 나의 이야기

‘왕과 나’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기존 왕조 중심의 사극과는 달리 ‘왕’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놓거나, 혹은 ‘나’에게 더 방점을 찍어두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시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왕과 나’의 재미는 바로 이 뒤집어 놓은 시점에서부터 비롯된다. 왕이 아닌 나의 이야기, 혹은 왕과 대척점에 선 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더 이상 권위주의 시대가 아닌 현재의 가치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나의 시점을 반영한 사극들
“내시는 사람도 아니란 말이냐. 내시에게 사람이길 포기하라 명하시니 내 그 어명을 받들 것이다.” 내시부를 혁파하기 위해 예종이 금혼령을 내리자 그 수장인 조치겸(전광렬)이 분노하며 하는 이 말은 왕의 뜻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이른바 선전포고인 셈이다. 한술 더 떠서 조치겸이 대전 앞에서 시위를 한다고 하자, 그의 양부인 노내시(신구)는 통쾌한 듯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암 누가 궁궐의 주인인지 똑똑히 보여줘야 하느니라.” 이런 대사들은 ‘나’의 시점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밑으로부터의 시점은 왕조 중심의 사극이 막을 내리고 퓨전사극이 등장하면서 태동해왔던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모’의 채옥을, ‘대장금’의 장금이를, ‘상도’의 임상옥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해신’의 장보고나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이순신, 그리고 심지어는 ‘주몽’의 주몽까지 모두 그 시점은 낮은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할 것이다. 즉 장보고는 당나라의 노예로 팔려가고, 이순신은 역모죄로 몰락한 양반집 자제로 차별을 겪는다. 주몽은 대소와 영포 왕자 아래에서 철부지 왕자로서 시작한다.

이렇게 주인공을 낮은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사극이 기본적으로 성장드라마를 갖고 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시대의 감수성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태생적으로 무소불위한 왕 혹은 영웅에 매료되기보다는, 좀더 자수성가한 영웅,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영웅을 요구한다. 이제 신화적인 존재를 신화로서 그리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한다.

상승한 나와 하강한 왕의 줄다리기
그런 면에서 ‘왕과 나’는 바로 이 낮은 시점의 재미를 극대화한 사극이라 할 것이다. 한쪽에서는 나인 김처선(오만석)의 성장드라마가 흘러가고, 또 한 편에서는 왕의 인간드라마가 흘러나오는 이 사극은 나의 상승과 왕의 하강이 서로 만나 부딪치는 극적 구조를 갖고 있다. 거기에 윤소화(구혜선)라는 여자가 왕과 나의 줄다리기의 정 중앙에 서게 되면서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즉 신분으로서의 나는 왕을 모시고 그 왕에게 사랑하는 여자의 합궁을 도와야 하는 존재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왕의 여자를 사랑하는 상황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참 후의 일이나 김처선의 어린 시절이 그려지고 있는 현재 그 관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의 처선(주민수)과 소화(박보영) 그리고 자을산군(유승호)은 물론 신분차이는 있지만 신분과 위치를 넘어선 오누이 혹은 친구의 관계를 보여준다. 신분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맺어진 이런 관계는 후에 신분 관계로 엮이면서 세 인물 모두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하다. 이 사극이 그저 퓨전이니 정통이니를 벗어나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룰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도저히 아역이라 할 수 없는 존재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주민수, 박보영, 유승호, 그리고 저 ‘주몽’에서 주몽을 키워주고 후에는 대결구도에 서게된 금와의 역할을 고스란히 이어서 하게 된 조치겸 역의 전광렬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모두 성장한 후 신분과 관계로 환원될 드라마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왕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게 되는 ‘왕과 나’는 제목에서부터 현대의 개인주의적 가치를 심어놓았다. 요컨대 이 드라마는 ‘왕과 김처선’이 아닌 ‘왕과 나’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김처선의 여러 면모들 속에서 각자 ‘나’에 해당하는 모습을 찾아내는 재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김처선이란 인물에 감정이입만 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극에 있어서 왕의 시대가 가고 이른바 ‘나’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