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씨남정기>의 갑질들, 현실적이라 더 슬프다
갑의 권력을 이용한 각종 갑질들. 그 갑질에 의해 몸도 마음도 상처 입는 을들. 하지만 갑질은 갑을관계에 놓인 회사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같은 회사로 심지어 늘 을의 입장에 있는 회사 안에서도 갑질이 벌어진다. JTBC <욱씨남정기>가 보여준 계약직 여직원 장미리(황보라)에게 정규직 평가를 내리는 위치에 있다는 권력을 이용해 접대자리에 데리고 나가 술을 따르게 하고 심지어 성추행까지 하는 신팀장(안상우)의 이야기가 그렇다.
'욱씨남정기(사진출처:JTBC)'
러블리코스메틱이라는 회사에 대외적으로 늘 갑질을 해온 황금화학의 김환규(손종학)상무가 있었다면 신팀장은 마치 러블리코스메틱의 리틀 김상무 같은 존재다. 밖에서 당하는 갑질은 그나마 안에서의 위로와 격려라도 받지만, 안에서 당하는 갑질은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비참한 일이다. 신팀장이 장미리에게 성추행하는 모습을 보고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입을 열지 못하는 박현우(권현상)는 사내에서 벌어지는 갑질이 왜 더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잘 드러내준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술자리로 불러내 겁탈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사건들은 예외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눈에 띄는 사건이 아니라도 부지불식간에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접대나 성희롱의 사례들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일 게다. 많은 이들이 그런 피해를 당하면서도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넘기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남정기(윤상현)와 조동규(유재명) 사장이 소셜커머스 업체의 담당자에게 자신들의 배너를 좀 더 위쪽에 배치해달라고 청탁하며 벌이는 접대와 향응은 또 어떤가. 그것은 남성들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만일 그들이 여성들이라고 생각해보면 그건 엄청난 희롱과 폭력의 현장이라는 게 그 실체라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을 듯이 술을 마셔대고 갑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는 그 익숙한 장면은 그래서 너무 현실적이라 슬프다.
러블리코스메틱의 옥다정(이요원) 본부장이 ‘접대’ 없이 영업을 하라는 이야기를 강조하게 된 건 스스로도 그토록 했었던 접대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걸 몸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정기와 조동규가 접대하는 그 담당자는 같은 시간에 김상무와도 자리를 함께 하는 ‘더블 접대’를 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이것도 극화된 내용일 수 있지만 이건 아마도 실제 현실일 게다. 경쟁사들의 경쟁적인 접대자리를 갑들은 이리저리 옮겨가며 받아왔을 테니.
<욱씨남정기>의 옥다정이 원리원칙을 추구하고 모든 갑을관계에서 관행처럼 벌어져온 갑질과 을의 행태들을 부정하는 캐릭터인 것은 거꾸로 우리네 부끄러운 현실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옥다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이다로 느껴지는 건 그것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 고구마 현실 때문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욱씨남정기>는 코미디지만 웃음 끝에 남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옥다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속 시원한 한방을 선사하지만 그것이 지목하는 일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남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옥다정 같은 원리원칙이 상식이 되는 현실은 요원할까. <욱씨남정기>가 웃음 끝에 전하는 메시지의 무게가 적지 않다.
'옛글들 > 드라마 곱씹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의 후예', 어쩌다 좀비 송중기가 됐을까 (1) | 2016.04.15 |
---|---|
'대박' 장근석의 하드캐리, 청춘의 현실을 닮았다 (0) | 2016.04.14 |
'기억'을 보면서 자꾸 세월호가 떠오르는 까닭 (0) | 2016.04.10 |
'태양의 후예'도 어쩔 수 없는 PPL의 딜레마 (1) | 2016.04.09 |
월화드라마, 연기력 대결로 치닫는 까닭 (0) | 2016.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