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사극, 이젠 다양한 시점을 즐겨라 본문

옛글들/명랑TV

사극, 이젠 다양한 시점을 즐겨라

D.H.Jung 2007. 10. 2. 14:29
728x90

‘왕과 나’와 ‘이산’, 같은 구도 다른 시점

‘왕과 나’와 ‘이산’은 여러 모로 닮은 점들이 많다. 먼저 이 두 사극은 과거의 왕조사극들이 다루던 정치와 전쟁이란 소재에서 벗어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의 구도를 보면 이 두 사극의 유사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과 나’는 성종(고주원)이 있고, 왕을 사모하는 윤소화(구혜선)가 있으며, 그 윤소화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처선(오만석)이 있다. ‘이산’에는 이산(이서진)이 있고, 이산을 사모하는 성송연(한지민)이 있으며, 그 성송연을 남모르게 애모하는 박대수(이종수)가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나고 얽히는 과정 또한 유사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세 사람은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왕이 될 세손은 여인에게 정표를 남기고 궁으로 돌아간다. 그 정표를 가진 여인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또 한 사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세손과의 약속에 따라 어떻게든 궁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려 한다. ‘왕과 나’와 ‘이산’의 인물설정과 이야기 구조는 이렇게 같다. 이유는 두 사극이 모두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그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신분의식이 약한 어린 시절이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한 구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무얼까. 사극을 이끌어 가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시점은 전적으로 ‘나’인 김처선의 시점을 따라간다. 신분의 벽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충성해야할 왕 사이에 선 김처선은 한 보 떨어진 곳에서 더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반면 ‘이산’의 시점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궁에 들어가 정적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어린 시절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여인을 그리워하는 이산의 시점이 하나이고, 궁 밖에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이산과의 약조를 기억하면서 도화서를 통해 어떻게든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성송연의 시점이 또 하나다.

이렇게 다른 시점은 사극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갈라놓는다. ‘왕과 나’의 시점이 되는 김처선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다. ‘삼능삼무의 운명’은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캐릭터를 대변한다. 따라서 이 사극은 비극을 그린다. 드라마 속에 잠시 쉬어갈 만한 코믹 캐릭터조차 허락하지 않는 처절한 비극이다.

하지만 ‘이산’은 이산과 성송연의 두 시점을 가져가기 때문에 비극이 되지 않는다. 사흘에 한 번씩 암살기도를 받아야 했던 이산이 가진 시점은 비극적이지만, 성송연이라는 상승하는 캐릭터는 이산마저도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산’에서 비극적인 캐릭터는 구도로 보면 ‘왕과 나’에서 김처선에 해당하는 박대수가 될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초점을 그에게 맞추지는 않는다. 드라마 속에 박달호(이희도)나 이천(지상렬) 같은 코믹한 캐릭터가 감초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점이 주는 발랄함 때문이다.

김재형 PD와 이병훈 PD는 제작발표회를 통해 이번 자신들이 연출할 사극이 과거의 자기 스타일과는 다를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의 이야기를 다루던 김재형 PD가 내시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과, 평범한 인물들의 성장기를 그리던 이병훈 PD가 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일 뿐,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연출스타일이 다르다는 건 아니었다. 김재형 PD는 특유의 클로즈업을 통해 비극적인 인물들의 감정선을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이병훈 PD는 단계마다 꽉 짜인 에피소드와 절제된 화면미학을 통해 시청자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제대로 작품을 만난 셈이다.

이처럼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사극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해졌다는 반증이다. 과거의 사극이 역사 자체를 드라마화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의 사극은 드라마가 역사를 입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만큼 사극은 재미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왕과 나’와 ‘이산’이 보여주는 비슷한 구도, 그러나 다른 시점이 주는 사극의 다른 맛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각을 즐길 것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