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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왕의 불륜, 내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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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사랑

‘왕과 나’는 분명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다. 이야기의 흐름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간다기보다는 그 때 그 때의 이벤트성 사건들로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각각의 사건들은 있는데 그것의 전체적인 연결고리는 희박하다. 그러니 한 사건이 끝나고 나면 다음 사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런 드라마들은 연속극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시추에이션 드라마 형태를 띄고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눈에 띄는 것은 그 도발적인 구도와 시선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성종(고주원)이 조선시대 최대의 성 스캔들을 일으킨 어을우동(김사랑)과 벌이는 애정행각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이러한 파격적인 장면들이 몇몇 있었지만 TV 드라마에서는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속살을 훤히 드러낸 왕이 어을우동과 침상에 누워 입을 맞추는 장면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물론 그림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 상황이.

아무리 왕이지만 어을우동은 남편이 있는 유부녀다. 게다가 수많은 남정네들에게 몸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마음은 허락하지 않았다는 허울 좋은 말로 둘러대며 공공연히 밝힌다. 하지만 왕은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어을우동과 합궁을 한다. 왕은 체통 같은 것 따윈 집어던진 지 오래다. 다른 남편의 아내를 범하는 불륜을 저지르면서 본처인 중전(구혜선)에게는 거짓말로 일관한다.

반면 내시들은 어떤가. 먼저 김처선(오만석)을 예로 들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궁을 한 인물이다. 혹자는 정신적인 사랑을 얘기하겠지만 범인의 눈으로 보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사극 속에서 내시란 인물을 그저 왕 주변에 서 있는 존재 정도로 생각해왔지만 이 사극이 되살이(자궁한 부위가 다시 살아나는 것)내시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 존재의 비극성을 보게 된다. 그 비극은 단지 살아있던 양물을 잘라냈다는 것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자궁을 한다는 행위가 가진 의미가 내시들에게 족쇄로 작용하는 현실이 진짜 비극이다. 되살이 내시가 생기는 것처럼 육체적인 거세는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양물이 살아나 되살이 내시가 되어도 여전히 그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육체적인 거세보다 무서운 건, 정신적인 거세다. 이것은 궁녀들의 입장을 보면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궁녀들은 거세한 입장은 아니지만, 궁에 들어온 이상 왕 이외에 어떤 남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다. 정신적인 거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이 거세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왕에게 절대 충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10여 명에 가까운 부인을 두고도 궁 밖의 여인, 그것도 유부녀와의 불륜을 태연자약하게 저지르고 있지만, 내시와 궁녀들은 최 내관과 박 나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사랑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사극이란 다루는 것은 과거이되 다루는 시점은 현재이기에 이러한 왕과 내시의 서로 다른 사랑을 지금 새삼스레 대비시켜 보여주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일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체가 자극적인 설정으로 세간의 이목을 잡아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왕의 불륜과 내시의 사랑을 보는 것이 어디 흔히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일인가. 또한 왕도 사람이라고 사극이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람의 입장으로 봐서는 왕이나 내시나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분명 비판적인 시각이 숨겨져 있다. 왕이 어을우동을 따라서 가게된 한 가난한 집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의 생신잔치를 해주는 아낙네에게서 그 시각을 느낀다면 과장일까.

돌아오는 길에 어을우동이 말하듯, 이 땅의 못 가진 자들은 무언가를(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것을) 얻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일부를 버려야하는 처절한 입장에 있는데, 가진 자들은 가진 것도 모자라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그것도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상황을 꼬집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딱히 남녀의 문제로만 보이지 않고 현재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적인 문제로까지 보이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만일 이것이 지나친 해석이고 과장이라면 이 사극은 본래 하고자했던 것을 제대로 못 보여준 것이거나, 혹은 방향성을 잃은 것이 틀림없다. ‘왕과 나’라는 제목에는 분명 그 같은 시각이 초심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