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았지만 닮아서는 안 되는 것, 개그와 정치
개그와 정치는 냉소적으로 보면 닮았다. 이른바 “웃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그 프로그램에서 종종 정치는 훌륭한 풍자개그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허경영 총재의 연이은 대선 출마는 투표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에 한 바탕의 웃음으로 기억된다. 황당한 공약과 주장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 자체가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는 정치풍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표를 하는 세대와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면서 허경영 총재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허경영 총재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분명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그적인 재미를 갖추면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분명 달라야 하는 정치와 개그가 같은 맥락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도대체 허경영 신드롬이 왜 지금 일고 있느냐고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신드롬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개그맨 뺨치는 인기를 통해 놀라울 것도 없는 행보지만, 정치인으로서 등장한 허경영 총재가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은 따라서 이미지의 혼동을 주게 된다. 그것이 늘 개그 같은 공약을 세워왔던 정치인으로서의 허경영 총재인지, 아니면 개그 프로그램에 나왔으니 어쨌든 재미를 주기 위해 개그를 하는 허경영 총재인지 불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이미지는 결국 둘 다 허경영 총재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웃고 넘기겠지만.
정치인이 시사 대담 프로그램이나 뉴스가 아닌 개그 프로그램, 혹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인기도를 얘기할 때, 그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연예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문제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힘이 자칫 정치적 권력과 맞닿으면서 생겨나는 부작용이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제 더 이상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하게 될 판인데, MBC ‘PD수첩’에서 방영한 ‘허경영 신드롬의 함정’으로 우리는 실제 그 상황까지 목도하게 됐다.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어 ‘눈빛 하나로 환자를 고친다’는 허경영 총재가 정작 자신은 콧물 감기에 걸려 약을 사 먹는 장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 이외에 사업적 목적으로 운영 되서는 안 되는 정당의 사업에 당당한 모습과, 비례대표제 공천을 미끼로 노골적인 액수를 들먹이며 국회의원 뺏지를 운운하는 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PD수첩’에서 허경영 총재가 자신의 인기도를 말하면서 언급한 시청률이다. “자신이 나가면 시청률이 두 배로 오를 정도”라는 것. 결과적으로 따지면 KBS ‘폭소클럽’이나 ‘연예가 중계’ 그리고 각종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분별하게 경쟁적으로 허경영 총재를 출연시킨 것은 바로 그 시청률이란 괴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되묻고 싶은 것은 아무리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또한 정치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것일까. 혹 모른 게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면 끝이라는 스스로 자신들 프로그램의 영향력에 대한 비하적인 관점을 가진 채 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네 정치가와 연예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그만큼 정치가 그동안 참 재미가 없었다는 반증이며, 게다가 일부 정치인들의 개그맨 뺨치는 행보에 대한 냉소적 시선들은 정치인의 위상을 개그맨과 거의 같은 위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연예가의 시청률 지상주의가 때론 재미만 있으면 다 된다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치와 개그는 정말 닮아 보이지만, 실로 이 둘은 닮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허경영 신드롬은 바로 이 두 지점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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