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주몽의 매너리즘과 주몽 벽에 막힌 연개소문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주몽의 매너리즘과 주몽 벽에 막힌 연개소문

D.H.Jung 2006. 8. 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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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드라마 최대 이슈는 아무래도 사극열풍의 주역인 ‘주몽’과 ‘연개소문’이 될 것이다. 그 중 ‘주몽’의 인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저 월드컵 시즌에도 식지 않는 열기를 과시했고 월드컵이 끝나자 마의 시청률 40%를 넘겼다. 심지어 휴가철을 맞은 지금에도 여전히 35% 전후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월드컵도 휴가철도 누르지 못한 ‘주몽’의 독주로 인해 타 방송사의 월화드라마는 아예 시작도 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주몽’의 강력한 견제자로 등장했던 ‘연개소문’ 역시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20% 정도의 시청률을 유지하던 것이 휴가철을 맞아 17%대로 떨어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고개를 드는 것이 주몽의 매너리즘이다.

고산국 소금산 모험에서부터 불거진 이 매너리즘의 정체는, 한 단계씩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던 주몽의 독특한 영웅상이 과거의 영웅상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해모수 밑에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주몽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주몽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주몽에게 드리워지자 그는 살아있는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닌 과거의 무기력한 운명적 영웅으로 변질되었다.

소금산 모험에서 주몽이 한 역할이라고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했던 소금산에 대한 옛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과 그 곳 주민을 만나보고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뿐이었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산채로의 침입에서 그가 얻은 건 비적들에게 포획되는 것이었다. 그를 구해내는 건 소서노며, 소금산까지 가게 되는 것 역시 소서노의 역할이 컸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소금산의 소금을 얻는 과정을 그저 과거 유화부인과의 고리에서 연유된 운명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주몽이 운명적인 영웅이 되자, 그에 도전하는 다른 무리들(대소나 영포)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운명 앞에서 도대체 그 어떤 도전이 가능하단 말인가. 유일하게 주몽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인물, 신녀 여미을이다. 여미을은 과거 해모수의 운명을 꺾어놓은 전과가 있다.

그러자 드라마는 이제 여미을과 그녀가 말하는 ‘부러진 다물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부러진 다물활이 부여의 

앞길에 암운을 드러내는 하나의 신탁이자 주몽의 운명이라면, 그 사실은 금와왕을 비롯한 부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야 마땅했다. 금와왕이 주몽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했지만 맥이 빠진 것은 금와왕 역시 해모수와의 틀에 박힌 운명적 우정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미을과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소는 이미 흔들리고 있고, 영포는 계속 헛된 짓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몽은 적 다운 적을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자 드라마는 커다란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 사라지고 소소한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진행되면서 긴장감을 잃고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주몽’이 40%라는 달콤한 시청률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이, ‘연개소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초반 안시성 전투 촬영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낸 연개소문이 얻은 것은 20여 %의 시청률과 전투 신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에 대한 비판, 들인 제작비만큼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여론이었다. ‘고구려사의 재조명’이라는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시청자들 중에서는 제작비 400억 원, 투입 연기자 400명, 보조연기자 1만 5000명이라는 이 기록적인 투자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까지 들려왔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10%대로 떨어졌던 시청률은 을지문덕의 출연으로 20%를 회복했으나 이 역시 무더위라는 복병을 맞아 17%라는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고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주몽’이라는 ‘퓨전사극이 가진 강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몽’은 일찌감치 시청자들을 퓨전사극의 맛에 길들여지게 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만큼, ‘주몽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과 성공’ 같은 욕망들이 포진되었다. ‘주몽’이라는 캐릭터를 영웅이 아닌 최대한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시작한 것은 일단 친근하게 접근하고, 차차 감정이입이 되는 시기부터 시청자들의 주몽을 통한 대리충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주몽’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미 많은 시청자들을 그 중독성 강한 설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청자들은 마음 속에서 이 어리버리한 ‘주몽’을 영웅으로 ‘키우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월드컵이라는 휴지기는 오히려 ‘주몽’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일 듯 보일 듯 안 보이는 그 안타까움과 기다림 속에서 ‘주몽’의 주가가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연개소문’이 시작됐다. 물론 퓨전과 정통이 다르지만 같은 사극이며, 또한 소재 역시 같은 고구려사라는 점에서 ‘주몽’의 시청자들은 ‘연개소문’을 시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주몽’이라는 게임의 재미 속에 빠져있는 시청자들을 ‘연개소문’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주몽’의 아기자기한 설정과 전개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이와는 다른 선 굵은 ‘연개소문’의 면모를 ‘디테일의 부족’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연개소문’이 결코 ‘주몽’과 비교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환경이라는 굵직한 작가가 사극을 통해 늘 보여주었던 것처럼 역사 속에서의 ‘활달하고 호쾌한 사내들의 한판승부’가 때론 전쟁과 전투의 형태로, 때론 정치의 형태로 장면 장면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디테일의 부족’은 아마도 ‘주몽’에는 있으나 ‘연개소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멜로 라인’이라든가, ‘성공에 대한 단계’ 같은 것일 가망이 높다.

하지만 이건 애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어느 정도 상상력이 들어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만 ‘연개소문’은 역사의 흐름을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인 반면, ‘주몽’은 역사보다는 한 ‘영웅의 탄생’을 그 주요한 축으로 잡아가는 드라마인 것이다. 만일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없는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으면 어땠을까. 불을 보듯 ‘연개소문’은 거칠 것 없는 저 시청률의 국경을 넘어 중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주몽’이 미리 만들어놓은 강한 퓨전 사극의 중독성은 결과적으로 역사 중심으로 풀어 가는 ‘연개소문’을 힘겹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주몽 탓’이라고 하기에는 ‘연개소문’에도 나름의 허점이 많다. 지금 현재 ‘주몽’이 걷고 있는 매너리즘의 길을 꿰뚫고 들어갈 만한 새로운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민족주의에 대한 소구는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힘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기왕에 민족주의적 영웅을 그려내는 드라마라면 역경과 고난이 있어야 하며,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에는 아직까지 그럴 듯한 적이 보이지 않는다. 수문제는 황후에게 쥐여 사는 노망난 노인처럼 그려지며, 전투에 나가면 연전연패하는 양량은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수양제는 좀더 교활한 면모를 가졌지만 아직까지 고구려의 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1,2회에서 보였던 당태종과 같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이는 아직 없다. ‘주몽’에서 주몽과 대적할 적이 없는 것처럼, ‘연개소문’ 또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연전연승이고 수당은 연전연패, 이제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승패는 운명적이 된다.

여기에 더 복잡한 것은 ‘연개소문’의 고전과 ‘주몽’의 매너리즘이 각자의 문제에서 머물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과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연개소문’은 계속해서 전쟁장면을 통한 민족주의적 영웅을 부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연개소문’의 부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반대로 매너리즘에 빠진 ‘주몽’을 살리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본래 중독성이라 하면 새로운 자극이 계속 해서 등장해야 그 기조를 유지하며 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몽’에 있어 새로운 자극을 한 회도 쉬지 않고 연달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연개소문’이라는 정통사극을 통해 다시금 ‘주몽’의 중독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심하게 빠졌지만 익숙해진 연애에서 상대방의 가치를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그 가치를 다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개소문’이 주말에 포진하고 바로 이어 ‘주몽’이 월화에 포진한 이 기막힌 상황은 ‘주몽’에 대한 기대감을 더 키워놓는 절묘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연개소문’이든 ‘주몽’이든 각자 따로 떼어놓고 보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재 이 두 드라마가 서로에게 주는 묘한 영향력 속에서, 양자가 동반추락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드라마라는 장르의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며, 갈등에는 반드시 주인공과 상응할만한 강력한 적을 필요로 한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갈등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영웅이지,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영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