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여자들>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강인하고 착하게 보이긴 했지만 남성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책임과 의무에만 절어있는 그들에게서 ‘발칙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자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줌마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환타지를 자극하는 젊은 미혼의 여자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웠다. 상대적으로 아줌마들의 문제가 소외되고 있을 때, 등장한 MBC의 ‘아줌마’라는 드라마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기존 아줌마 상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권위주의적인 남편과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충격을 넘어서 박수를 쳐주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태동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미주(유호정 분)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속 여자들의 삶을 단번에 뛰어넘는다. 조강지처였던(1단계) 미주는 정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치과의사가 된다(2단계). 그리고 그녀는 귀국해 전 남편 정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자 루키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3단계). 이 3단계의 변신을 보면 그녀가 저 조강지처의 70년대를 넘어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나중에는 아줌마지만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자가 되는 그 변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여성상의 변화는 그 반대 역인 악역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언뜻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네들을 핍박했다는 생각에 남성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다. 70년대 착한 며느리의 대척점에는 악한 시어머니가 있었고, 90년대 이후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대척점에는 일과 사랑 둘 다를 쟁취해야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들이 있었다. 이렇게 억압의 주체는 드라마 상에서 정면으로 주인공과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을 내세워 대리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게 1999년 방영된 ‘아줌마’다. 그리고 ‘발칙한 여자들’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상처를 준 남성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에서는 부부만 있을 뿐, 모실 부모들은 없으며, 직장에서는 각각 인정받는 전문직 종사자만 있을 뿐 라이벌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유혈이 낭자하지도 않고, 눈물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 귀여운 장난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실 처절하고 질척질척한 복수극의 이면에는 아직도 남은 미련과 집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이 발칙한 여자는 복수조차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은 깨지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이 등장하게 된다.
경제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의 사랑과 삶은 여유가 있다. 아마도 ‘발칙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과거 결혼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혼 후의 여성에서, 이제는 결혼 후에도 당당하게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의 여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희화화된 남성과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역시 어찌 보면 그간 불륜과 신파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아줌마상을 염두에 둘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앞으로 드라마 속에서 꿈꿀 세상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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