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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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탕과 보이지 않는 채찍

D.H.Jung 2006. 8. 2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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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포커스를 받지 못한 천둥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둥이는 자신의 부모, 장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인간들의 굴레 속에 평생을 견뎌내야 할 운명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태어나는 날, 부모를 저 세상으로 보낸 천둥이는 단지 일어서지 못한다는, 그래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기능적인 이유(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읽자면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따라갈 위기에 처한다(달리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는 사고는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그런데 천둥이를 구해내 달리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은이다. 하지만 살았다 해도 앞으로 인간들의 굴레 속에 살아갈 천둥이의 운명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천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나이트클럽에서 학대받는다. 그런 천둥이를 다시 만난 시은은 이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천둥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천둥이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경마장, 그 인간들의 순위 경쟁 속에 내세우는 것이다. 천둥이는 경마장에서 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저 인간 없는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둥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저 천둥이와 비슷하다는 사회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지 않고 나이트클럽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둥이의 모습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경마장이라는 서기 싫었던 생존경쟁의 장에서(그것도 내가 아닌 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천둥이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하는 얘기를 닮아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둥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시은에게 포커스를 더 주고 있는 이 영화 속에는 그 악역이 명백하다. 시은과 윤 조교사의 대척점에 있는 철이와 김 조교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과도한 경쟁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만으로 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채찍이 아닌 각설탕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채찍이든 각설탕이든 그것은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일 뿐, 근본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화된 채찍보다 은근히 본질을 숨기는 각설탕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달콤한 중독으로 사로잡는 현대적 의미의 또 다른 채찍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이는 왜 마지막 순간에 수술을 받고 더 오래 사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천둥이의 의지가 무엇 때문이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렇게 해석된다. 그 자의적 해석은 천둥이의 비극을 가져온다.

영화가 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순위 경쟁으로 다시 내몰아 1등으로 골인점을 통과하고는 죽는 천둥이와 그 앞에서 오열하는 시은을 그리기보다는, 이 경쟁사회의 경마장에서 탈출하는 천둥이와 시은의 모습이 그려졌어야 옳다. 천둥이의 죽음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비극적인 운명과 닮았다는 맥락에서 슬프지만, 천둥이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시은의 모습에서 전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