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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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1천만 관객 시대에 고함

D.H.Jung 2006. 8. 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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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에게 고함

흔히 ‘마이너리티’라고 하면 숫적으로 적은 집단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영화계만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계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메이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개봉 21일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해도 그건 단 한 편의 영화일 뿐이다. 빛의 이면, 즉 그림자 속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인생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면 ‘청춘’은 어디에 속할까.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속에 잘 적응되어 그 주류사회에 편입한 노회가 메이저라면, 청춘은 단연 모든 것이 미숙하고, 그래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가 될 것이다. 게다가 메이저 사회는 이들 마이너들을 소수자집단으로 치부하면서 억압하고, 이용하며, 들러리 세운다. 1천만 관객 시대에 1만 명 관객 동원을 기뻐하는 ‘내 청춘에게 고함’은 바로 이런 메이저 사회 속에 숨막혀하는 마이너들(청춘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영화 현실을 닮아 있다.

꽉 막힌 답답한 빌딩 숲 속의 청춘
영화는 21살의 혼란스런 청춘, 정희의 뒷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정희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친구의 옥탑방을 찾아가는 길이다. 문은 닫혀있고 벽돌 위에 쪼그려 앉은 정희는 캔맥주를 따려다 손톱에 상처를 입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답답하게 화면 속에 정희를 가둔다. 그때 정희는 마치 그것이 답답하다는 듯 갑작스레 벽돌을 들고 닫힌 창을 향해 집어던진다. 그리고 난간 쪽으로 걸어가 “왜 좀더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댄다. 그 때 잠깐 카메라는 정희의 숨통을 틔워준다. 그러나 그 풍경에 들어오는 것은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의 바다에 섬처럼 돋아나 있는 아파트 건물들이다.

다음 장면에 정희는 언니를 만나러 교회로 간다. 카메라는 교묘하게 교회 담장을 가운데 두고 담 밖에 정희를 세우고 담 안쪽에서 나오는 언니를 잡는다. 세상 밖에서 혼란스러운 정희에게 교회담과 성가대복으로 안전해 보이는 언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자고 한다. 그들이 이사가기로 한 집은 한쪽 벽이 창으로 나 있다. 그 창 밖으로 역시 비치는 풍경은 가옥들의 바다에 뜬 아파트들이다. 그 집에 대해서 정희는 창이 너무 넓지 않느냐고 하고, 언니는 넓어서 좋다고 한다. 정희는 위성으로 보면 창이 넓어 우리가 다 들여다보일 지도 모른다고 한다. 정희는 지금 숨는 중이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이 숨을 보금자리를 찾는 중이다. 비좁고 어둡고 어지러운 남자친구의 집에서 섹스를 하는 정희가 “섹스가 아니면 날 만나겠냐”고 남자친구에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남자친구의 공간은 그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잠시 망각할 수 있는 도피처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이유는 어린 시절, 남들이면 다 가졌을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었고 이제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녀는 미숙하다. 그녀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의 결별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에게 “나는 정희가 아니고 에비타(정희가 맡은 배역)”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밀쳐내고 혼자 서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한 평의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 사기를 당한 그녀가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잠시 자신의 공간이 되어주는 여관방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에게 경찰은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한 내밀한 이유를 들어주지 않는다. 단지 그 방안에서 콘돔이 나왔고, 그래서 성행위가 있었는가 하는 그런 따위의 것들만이 현실에서 그녀와 소통하는 것들이다.

그녀는 사실 그 누구와도 소통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저 아파트 숲을 향해 고한 말들은 대상이 없이 허공을 떠돌았고, 남자 친구집 창을 향해 던진 벽돌은 도둑의 짓으로 오인된다. 지하철역에서의 자살시도는 그 이유를 묻지 않는 용감한 시민들에 의해 좌절된다. 자신이 부정했던 아버지는 한강에 투신한 시체로서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이제 그녀가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소통을 포기하는 일이다. 한강철교 위에서 자신을 투신하듯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소통의 대상조차 없는 청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넘어오면 근우는 아예 소통의 수단이었던 공중전화박스를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공중전화라는 공공의 소통창구가 버젓이 있던 시대에서 휴대폰이라는 사유화된 소통수단의 시대에 근우는 서 있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전혀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두 번째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근우는 그 불안하기만 한 (사회라는 이름의) 담벼락 위를 (사회의 의미 따위에) 눈을 감고, 무모하지만 더듬더듬 걸어 나가는 중이다.

그는 같은 직장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동병상련식의 토로에 가깝다. 연기자지망생으로 ‘연기연습을 하는 것’이라며 여관방을 급습해 협박을 하는 선배라는 작자는 어떤 규범의 선을 넘어서 느끼는 기형적인 소통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근우는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 방법밖에는 찾지 못한다. 우연히 남의 전화 통화내용을 엿듣게 되면서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창 밖 전신주 위에 올라 자신이 집착하게 된 여인과 그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의 대화를 듣는 건 슬픔을 떠나 절박하기까지 한 근우의 상황을 말해준다. 결국 근우는 남자와 여인의 대화를 연결해주는 전화선을 잘라버리고, 선을 넘는다. 술취한 남자를 노래방에 데려가 여인이 좋아하는 노래, 김보연의 <생각>을 부르며 폭행하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한 소절을 부르고 나서 마치 들으라는 듯 남자를 폭행하는 장면 속에 근우의 단절된 삶의 극단을 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근우는 ‘고(告)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의미 없이 하고 있는 공중전화박스 수거는 사실은 스스로가 자신의 단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근우는 의미를 두지 않았던 죄로 결국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통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역시 전화로 통지된다. 여인에게 버림받은 근우에게 회사는 해고통지를 하고 노조는 투쟁에 합류를 권유하지만 근우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철길 위에 서 있는 기차를 본다. “왜 저 기차는 늘 저기에 있지?”하는 말은 근우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근우는 어지럽게 난 철길 위를 서성댄다.

청춘을 버려 얻은 것, 혹은 잃은 것
세 번째 에피소드는 마치 20대를 지낸 정희와 근우가 그 고달픈 청춘을 지나 서른에 얻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독문과 박사과정 학생이었지만 서른 살의 늦깎이 군인인 인호는 결혼을 해 마련한 자신만의 공간도 있고, 또 언제든 전화를 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내도 얻었지만 대신 그는 청춘을 버렸다. 영화 초반 짧게 나오는 군대 장면에서 인호는 이제 닳고닳은 병장으로 신병을 놀릴 줄도 아는, 현실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나온 마지막 휴가에서 그는 여전한 공간의 부재와 소통부재의 현실을 절감한다. 집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지만 아내는 없고, 대신 그 빈 공간에서 아내의 부정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만의 보금자리였던 그 집은 이제 그를 소외시킨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오고, 자신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는 대상을 잃고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집은 인호를 밖으로 떠민다. 그는 같은 군대의 후배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대학동창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거기서 급기야는 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를 다시 집으로 복귀시키고 소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내의 고백이다. 아내가 자신의 부정을 고백한다면 모든 일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는 입을 다문다. 그러니 스스로 아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여인과의 하룻밤을 이용한다. 아내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엇나간 관계를 확인하는 꼴이 될 뿐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인호와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는 세 개의 철길이 등장한다. 정희가 그 외로운 떨림을 듣기 위해 귀를 대고 있는 철로와, 수많은 길이 있지만 자신이 갈 길을 정하지 못하는 근우의 철길, 마지막으로 그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위에 탄 인호의 철길이다. 청춘을 살아가는 정희와 근우는 그 철길 위로 오르지도 못했고, 인호가 오른 철길 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된다. 청춘일 때는 길을 몰라서 헤매고, 이제 현실에 들어오자 엉뚱한 국면을 맞게 되는 그 지점에서 세 편의 에피소드는 하나로 묶이며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단순히 청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소통되지 않는 현실을 청춘에 빗대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수없이 전화하고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 전화는 받지 않거나, 통신장애거나, 받을 수 없게 된다. 영화 자체도 세 편의 에피소드로 단절되어 있으며,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독립적인 생활의 공간 속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 그나마 이 세 편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는 영화 뒤편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이다.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거나, 노래방에서 폭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사회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웃음을 지었던 것은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의 고립이 타인의 삶에 어떤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1천만 관객 시대, 600여 개의 극장 동시개봉을 말하는 시대에, 1만 관객 동원과 3개의 상영관 개봉은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마치 자신이 처한 처지를 그대로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소통과 보금자리인 극장은 어디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이너로 치부된 영화가 설 자리는 많지 않다는 것.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는 사실이 미숙해 보이는 청춘들처럼 마이너에 선 영화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누가 그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열어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