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서해 최고의 해변 신두리’. 말 그대로 정말 멋진 곳이지만 우리가 이미지적으로 해변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그런 해변은 아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는 백사장에서 보이는 바다가 나오지 않는다. 물 빠진 뻘 위를 걷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 분), 영화음악작곡가 문숙(고현정 분), 영화세트미술가 창욱(김태우 분),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유부녀 선희(송선미 분) 이들의 하룻밤은 전혀 낭만적인 냄새가 없다. 그런데 이건 왠일일까. 이 일상적인 이미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기는 것은.
홍상수 감독은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철저히 관객들을 배반하고 싶었나 보다.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은 창욱의 애인으로 온 문숙이 바닷가에 도착해 “우리 애인 아니예요”라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바닷가가 비추는 을씨년스런 풍경들 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그것은 어쩌면 고현정이라는 배우가 캐스팅 되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현정의 새로운 면모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우리가 가진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영화가 말하려는 일상적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고현정은 마치 “연기하지 말라”는 감독의 지시를 들은 연기자처럼 연기한다. 고현정이 쌍소리를 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일종의 ‘즐거운 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웃기는 개그 코드와 맞닿아 있다. 마치 노을지는 바닷가 앞에서 뭔가 사랑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연인이, 실상은 온통 살이 그을려 서로의 살을 건드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줄 때 나오는 웃음과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웃긴다.
그런데 웃으면서 자꾸 뒷덜미를 당기는 것이 있다. 머리 속에 그려진 일상적인 이미지가 자꾸 깨지고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삶이 비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래가 자신이 과거의 ‘나쁜 이미지들’(실상은 아내가 바람핀 것)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일이 도형까지 그려가며 ‘나쁜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를 교란시키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중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이중성을 보게 된다. 그의 설명은 아이디어로 넘치고 재미있는 해석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변명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 간극 사이에서 관객들의 웃음은 터진다. 그런데 그 웃음의 뒷맛이 쓴 것은 그 모습에서 언뜻 관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냉소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감독이 그런 일상에 던지는 진지한 시선 때문이다. “무슨 영화를 구상하고 있냐”는 창욱의 질문에 중래는 자신이 구상하는 대충의 영화 스토리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이 세 번 반복되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긴 주인공이 몇 십 년에 걸쳐 그 기적의 비밀을 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영화는 중래의 말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같은 술집과 펜션, 밤늦게 물 빠진 해변에서 만나는 남녀, 잠자리, 개를 데리고 해변을 걷는 남녀 등등. 그걸 통해서 영화는 마치 중래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상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 보던 것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반복이지만 그 속의 내용들은 조금씩 다 다른 구체성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마저 깨뜨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어렵게 느껴왔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실컷 웃어도 좋다. 그렇게 웃다보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굳건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즐겁고 재미있는 대중성을 확보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박찬욱, 봉준호 같은 자기 세계가 투철한 작가들이 동시에 대중성을 획득하는 줄타기에 성공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역시 자신의 세계와 대중성이라는 양끝의 균형자를 들고 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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