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성은 쇼의 생리지만, 지나치면 리얼리티를 없앤다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시절, 출연진들이 삽을 들고 포크레인과 도전을 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들이 저런 무모한 짓을 할까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 몸 개그를 유발할 수 있는 가학적인 설정은 이제 그것이 ‘웃기다’는 것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무한도전’의 황사대비특집에 대한 예고장면에서, 정형돈의 얼굴에 한 초록색 물감칠에 대한 네티즌 의견이 엇갈리는 건, 이 가학성이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시청자들은 그 장면에 정형돈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가학적 설정은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 복불복 게임으로 대변되는 ‘1박2일’의 가학적인 장면들은, 단지 누가 한 겨울에 밖에서 잘 것인가 같은 비교적 보이스카우트 시절을 연상케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진 그들은 간장이나 까나리 액젓을 통째로 들이마시거나, 보기에도 위험천만인 겨울철 높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생계 버라이어티쇼라는 ‘라인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출연진들의 실제상황, 즉 생계가 거기서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에 그 자극적 상황이 종종 진정성으로 연결되는 미덕이 있을 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학성은 출연진들과 연출자와의 묘한 대결구도까지 만들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김태호 PD를 종종 ‘악마’라고 부른다. 자신들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빠뜨리고는, 그들이 그 상황 속에서 허우적댈 때 오히려 연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출연진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박2일’에서 멤버들은 어느 순간 잘 대해주면, ‘이건 또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식으로 의심을 한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상황과 반응이지만, 그래서 실제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지만, 그래도 웃음 끝에 씁쓸한 구석이 남는 건 왜일까.
단지 가학적인 장면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쇼에 포함된 가학적 상황과 그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기실, 현실사회 속에서의 우리네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는 그 모든 상황들이 통제되는 것에 만족한 웃음을 지을 수 있지만, 그 상황의 중심부에 서게 되는 밑바닥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도무지 자기 앞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묘한 가학-피학적 심리상황을 만들어낸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피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속에 가학적인 앙금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TV쇼는 이런 상황을 역전시켜 그 현실의 앙금을 털어 낸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의 멤버들을 우리는 위에서 보면서 즐긴다. 밑에 있는 그들은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상황 자체가 가학적일수록 우리는 더 리얼하게 느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쇼가 끝났을 때이다. 그 순간 시청자는 바로 저 TV 속 캐릭터들이 처한 현실 상황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끄트머리에 남는 씁쓸함의 정체이다.
그러니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설정하는 상황의 지나친 가학성이 왜 논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학적인 장면을 보는 시청자의 마음 속에는 가학-피학의 양면성이 존재하는데, 지나친 장면은 오히려 그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가진 가학성은 쇼의 생리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피곤한 삶을 살아온 시청자들에게 그 짧은 시간의 일탈을 위한 가학성을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 지나친 상황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하여 불편하게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나 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전성시대는 이 시대의 현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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