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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고현정, 서민적 이미지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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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 시대의 요구

요즘 고현정의 변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쌍소리는 물론이고 망가지는 연기에서부터 거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새로운 면모들까지 고현정은 싹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우아하고, 청순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고현정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깨려고 작정한 듯 하다.

‘봄날’ 이후 1년여의 장고 끝에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역시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고현정의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기자시사회에서 그녀의 변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건 일상용어 아니냐”고 되받아 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은 ‘해변의 여인’이 주는 영화적 재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일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본인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이미지의 파괴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여우야 뭐하니’로 다시 맨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속의 털털하고 화장기 없는 고현정이 이제는 TV로 들어온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과 마찬가지의 파격을 보여주었다(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았던 시청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연속적인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 작품에 딱 맞는 연기자가 고현정이라는 인물이었듯이, 고현정에게도 ‘해변의 여인’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분명하다.

지금 고현정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며 청순한 과거의 이미지에서 보다 서민적인 이미지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고현정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10년 전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재벌가 며느리로의 변신한 그녀는 언론과의 끊임없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이혼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10년 간 연기자가 아닌 고현정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는 대중들의 막연한 상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기라는 친정으로 귀환하면서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부터 부수기로 작정한 듯 하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 즉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파괴는 극중 캐릭터의 진정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행히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공감이 가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현정의 파격을 ‘리얼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에서 파티쉐라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리얼하게 드러냈듯이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곳곳에 이런 리얼함이 엿보인다(잡지사, 산부인과 등등). ‘성담론’이라는 자칫 오해될 소지가 많은 소재가 오히려 당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리얼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고현정이 거침없이 얘기하는 속내는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는 듯 하다. 성 칼럼니스트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현대미국여성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듯이,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병희는 우리 식의 적극적인 여성상을 통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는 이제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시청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비호감 연예인들의 인기’와 ‘연예인 생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바로 스타와 시청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이것은 ‘솔직함’ 혹은 ‘털털함’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연예인 스스로의 ‘자신감’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연예인에게 ‘인형 같은 카리스마 혹은 신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바로 내 주변에서 살아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현정의 서민으로의 귀환은 당연하고도 잘 된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한없이 망가질 것이나 여전히 귀엽고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여자 같으면서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