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의생’, 신원호 PD가 시트콤과 드라마 사이를 선택한 까닭
“미국 드라마 <프렌즈> 같은 느낌으로 만들고자 했다.”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는 제작발표회에서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미국의 장수 시트콤인 <프렌즈>를 거론했을까 싶었지만,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코미디만이 아닌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시트콤의 이야기 구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의대 5인방이라는 캐릭터를 주축으로 율제병원의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특별한 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내기보다는 에피소드별로 나열되는 형식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첫 회에 안정원(유연석), 2회에 채송화(전미도), 3회에 이익준(조정석)과 김준완(정경호) 그리고 4회에 양석형(김대명)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들을 차례로 담아냈다.
그러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매력적인 주변인물들을 채워 넣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러브라인은 그 관계의 주요 촉매제로 등장한다. 안정원을 짝사랑하는 장겨울(신현빈), 김준완의 고백에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한 익준의 동생 익순(곽선영), 채송화에게 좋아한다 고백하는 후배의사 안치홍(김준한), 양석형의 환자를 배려하는 모습에 반해버린 추민하(안은진) 게다가 황혼에도 우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정로사(김해숙)와 주종수(김갑수)까지 달달한 관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러브라인을 넘어서는 우정이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남매애, 동료애도 빠지지 않는다. 양석형의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효심이 그렇고, 싱글대디가 된 이익준과 아들 이우주(김준)의 찐 부자애, 친구처럼 유쾌하지만 진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익준과 익순의 남매애, 채송화를 좋아했지만 그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양석형과 그 때문에 고백을 포기했던 익준의 우정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무언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메인 스토리가 있다기보다는 캐릭터들이 세워지고 그들이 서로 관계를 이어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나열되는 구조인지라, 본격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딘지 무게감이 덜한 드라마로 보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목표가 있어야 극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항상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누구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그 목표 지점이었다. 그래서 산발적인 에피소드들도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귀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런 목표 지점을 세워두지 않는다. 병원 내에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도 없고, 게다가 이들을 외적으로 위협하는 어떤 압력이나 세력도 없다.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목표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한 줄기의 목표 대신,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자잘한 일상에서 부딪치는 작은 갈등들과 선택들을 다룬다. 그러니 특정 시추에이션을 가져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트콤을 닮은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드라마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시트콤은 아니다. 그런 자잘한 일상 소재 속에서도 웃음만큼 감동적인 메시지들이 담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어딘지 무게감이 떨어진다 여겨지는 건 어쩌면 우리가 드라마라고 하면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달려 나가는 ‘본격 드라마’를 떠올리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시트콤은 드라마가 아니며 심지어 본격 드라마보다 낮게 바라보는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트콤은 그렇게 취급받을 장르가 아니고, 드라마에도 다양한 결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본격 드라마만이 진짜 드라마라는 생각에서 살짝 벗어나보면, 다소 시트콤적이고 때론 예능 프로그램을 드라마화한 것 같은(캐릭터를 세우고 매회 관계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이 드라마의 편안한 매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생각해보면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예능적인 접근방식을 제대로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앞선 실험들이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형식적으로도 편성적으로도 좀 더 시스템화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이 작품이 드라마지만 마치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처럼 캐릭터를 공고해 세워 매 시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장착해 돌아오는 그런 드라마로 서게 된다면 그건 우리네 드라마에서 색다른 지대를 여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너무나 어려운 편성이나 제작방식 때문에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시트콤 형식의 가치를 세워주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이런 실험은 훗날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가 기획한대로 ‘슬기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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