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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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용머리보다 중요한 건 꼬리다

D.H.Jung 2008. 6. 1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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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방영에 변칙편성까지 시청률에 경도된 ‘이산’

‘이산’은 소재로 보나 특유의 시각으로 보나 훌륭한 기획의 사극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파당정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 게다가 이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이런 되는 소재를 가지고 ‘이산’은 왕과 개인으로서의 정조를 모두 다루는 독특한 사극의 한 장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의 창대함을 두고 볼 때, ‘이산’이 얻은 것은 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초기 너무 과도한 의도를 세워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작품은 뒤로한 채 시청률에 경도된 연장방영이나 변칙편성은 오히려 초반부 ‘이산’의 참신한 기획마저 색 바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산’은 보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창대한 기획에서 빗나간 초반부
‘이산’의 기획의도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 창대한 기획의 면면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기획의도에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가진 정조는 물론이고, 파당정치를 해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정조, 실물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정조, 다양한 실학파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와 과학에 꽃을 피웠던 정조,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했던 정조까지를 다루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산’은 그저 왕조의 정치사만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정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을 모두 한 편의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종영을 앞둔 ‘이산’이 다룬 것은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했다. 탕평책을 시행해나가는 정조의 에피소드도 구체적인 것이 거의 없었고,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에피소드도 금난전권 철폐라는 발표로 그친 격이 되었다.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있던 성송연(한지민)의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 에피소드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군제 정비나 병기 연구 과정 에피소드의 하나로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예책자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이산이 정조가 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이산이 비로소 정조가 된 것은 45회에서다. 애초 계획이었던 60회에서의 종영은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정조의 업적이나 애초 의도에 들어있던 정조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정순왕후(김여진)를 위시한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암살시도(이것은 거의 마지막까지 다시 반복된다)와 영조(이순재)의 시험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의 모습을 과도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연장방영,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반부 이산보다 더 주목된 것은 영조와 홍국영(한상진)이었다. 즉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로써 영조와 홍국영(때로는 성송연)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 힘이 위치이동을 한 것이다. 영조의 매병(치매) 설정이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 정조를 다루기에도 벅찬 ‘이산’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시청률이란 잣대로 보면 이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극의 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영조였기 때문이다.

중반 이상을 지나오면서 정조가 아닌 영조에 집중된 ‘이산’에 있어서 MBC의 16부 연장방영 결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연장 결정의 이유로서 MBC가 내세운 것도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서”와 “이산과 송연과의 멜로 라인 등 그 밖의 다루지 못한 부분으로 이산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연장방영 속에서도 여전히 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각된 것은 홍국영이다. 홍국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추락에 대한 에피소드가 지속되었고, 본래 기획의도에서는 도화서에서 나와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에도 들어가는 등 능동적인 캐릭터였던 성송연은 궁중 시집살이(?) 에피소드가 거듭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홍국영의 죽음과 성송연의 장결병이란 불치병 에피소드로 채워지는 동안,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 인물들과 정약용(송창의)의 간간한 ‘보고’로 처리되었다.

시청률이 ‘이산’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산’은 성군으로서의 정조를(특히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산’이 선택한 것은 완성도보다는 시청률이었다.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초반부 그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장방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에 걸맞게 완성도를 보충해나갔어야 한다. 300회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나저제나 정조로서의 면모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필자 같은 시청자들로서는 이 대책 없는 후반부의 허무함을 성송연의 죽음, 정조의 죽음 같은 감성적 충격 혹은 화성 원행 같은 스펙타클로 채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최근 ‘이산’의 종영을 두고 벌어진 ‘오락가락 편성’은 그 마지막 끝나는 길까지 이 드라마가 시청률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유야 어쨌건 두 차례의 스페셜 프로그램과 한 주에 한 번씩 띄엄띄엄 편성된 ‘이산’의 종영은 확실히 정상적인 끝맺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끝맺음을 함으로써 시청률로 보면 ‘이산’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송사에 최대의 이익을 남겨준 드라마가 되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이산’은 바로 그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종영하는 마당에 ‘이산’의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 자칫 성공하는 드라마의 한 전형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들은 초반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편성 전쟁의 진짜 얼굴은 이것이다) 초반 시선잡기에 대부분의 힘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지속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힘주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부터의 긴장감 저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다반사다. 용의 머리만큼 중요한 것이 용의 몸통이자 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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