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그란 세상

미얀마 시민들의 힌츠페터

728x90

'모래시계'에서 '오월의 청춘까지',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 확장

 

1995년 1월부터 2월까지 밤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밤 9시50분부터 한 시간 동안은 거리가 텅텅 빌 정도였다. 당시 대중들의 시선은 한 TV드라마에 쏠려 있었다. <모래시계> 신드롬이었다. ‘귀가시계’라고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끌었던 <모래시계>는 최고시청률 65.7%를 기록했을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그 해의 백상예술대상은 TV부문 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극본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모두 <모래시계>에 안겼다. 

 

드라마 '모래시계'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간 TV에서는 거의 금기시 되다시피 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들이 드라마 속 장면으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는 점이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당시의 끔찍했던 장면들이 알려지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많은 대중들은 <모래시계> 속에 담긴 광주의 처참한 장면들이 드라마가 아닌 실제 영상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건 1980년 당시 TV뉴스가 했던 보도들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1980년 5월27일 자 KBS 9시 뉴스는 앵커의 이런 멘트로 시작한다. “광주사태는 발생 10일 만에 진압돼서 평정되어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을 돕기 위한 생활필수품 공급을 비롯한 각종 구호작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한 괴뢰는 여전히 광주사태에 대한 선동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그 뉴스는 민주화 운동에 나선 시민들을 폭도로 부르고 이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인 양 날조하면서 계엄군이 마치 이들로부터 위협에 시달리는 평범한 시민들을 구원한 이들로 둔갑시키고 있다. 당시의 국내 언론이 얼마나 독재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일부 언론인들이 정부에 반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해고되거나 좌천되는 일을 겪었다. 이러니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 진실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80년 광주 당시의 생생한 영상들이 남을 수 있었던 건 한 외신기자 덕분이었다. 북부독일방송 도쿄지국 소속 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서울에서 한 택시운전사와 함께 광주로 잠입해 들어가 현장을 취재한 영상이다. 힌츠페터는 5월19일 광주에 잠입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히 카메라에 담았고 그 필름을 과자 통에 숨겨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북부독일방송 뉴스 프로그램에 방송되면서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힌츠페터는 이후에도 또 다시 광주에 잠입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이 영상은 향후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중대한 힘을 발휘했다. 

 

1995년 <모래시계>가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건 1993년 첫 번째 문민정부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달라진 정국과 무관하지 않다. 김영삼 정권은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을 반란죄, 횡령, 살인죄로 체포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1997년 4월17일 사법부는 전두환에게 내란과 내란 목적 살인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국가가 당시까지만 해도 ‘광주 사태’라는 잘못된 표현으로 지칭되던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 판결문에는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방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광주 민주화운동은 영화의 공공연한 소재로 다뤄질 수 있게 됐다. 1996년 장선우 감독이 <꽃잎>으로 5월 광주의 아픔을 담았고, 이후에도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같은 작품들이 대중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았다. 특히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을 알렸던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담은 <택시운전사>는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기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제 5.18 광주는 더 이상 문화콘텐츠 속에서도 금기시될 소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최근에는 드라마들도 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5.18광주를 소재로 담을 정도로 당대의 진실은 익숙한 일이 되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KBS <오월의 청춘> 같은 드라마는 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청춘들이 마주하게 된 설렘과 아픔을 담아내고 있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이처럼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5.18민주화운동이 최근 미얀마에서 군부 구데타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비극을 통해 다시금 그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미얀마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 후 인상이 좋아진 나라’로 89%가 한국을 꼽았고, 그 이유로 5.18민주화운동을 들었다고 한 것. 즉 우리가 겪은 5.18민주화운동이 군인들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구속하고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광경에서, 미얀마 시민들은 미얀마 군부가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구속하고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미얀마 시민들은 그래서 <택시운전사>를 보라고 권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 시민들이 5.18민주화운동을 하나의 희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뿌듯한 일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그것은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힌츠페터 같은 외신기자의 노력으로 전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과연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운동’을 얼마나 제대로 조명하고 알리고 있는가 하는 반성이 앞서기 때문이다. 물론 적지 않은 양의 미얀마 관련 보도가 나오곤 있지만,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분석보도보다 본질을 흐리는 자극적인 장면이나 기사들이 많았다는 게 미디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980년 광주는 지금 2021년 미얀마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80년 광주의 참상이 그 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그 진실이 알려지게 된 그 과정들에서 희망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힌츠페터 같은 외신기자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진 국제적인 연대가 존재했다. 이제 우리도 미얀마 시민들의 힌츠페터가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글:이데일리, 사진:SBS,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