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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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세상

TV, 범죄에 빠지다

D.H.Jung 2021. 5. 2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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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교양 속으로 들어온 범죄

 

최근 범죄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실제 사건들을 가져와 허구로 그려낸 드라마는 물론이고, 범죄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의 교양 프로그램이 그렇다. 무엇이 이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만들고 있을까.

 

지금 드라마는 범죄 스릴러의 시대

바야흐로 범죄 스릴러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최근 드라마 중 범죄스릴러 장르는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하게 됐다. tvN <마우스>, JTBC <괴물>, SBS <모범택시> 같은 작품들은 모두 19금 수위의 범죄스릴러지만,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모두 거머쥐었다. <마우스>가 최고 시청률 6.6%(닐슨 코리아)를 기록했고, <괴물> 역시 5.9%의 높은 시청률로 종영했다. <모범택시>는 무려 16%의 최고시청률을 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

과거 범죄 스릴러가 다소 마니아적인 장르라 여겨졌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최근 드라마의 이런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2007년 사극을 쓰던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내놨던 MBC <히트>는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가져왔지만 생각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시청률이 월등히 높은 18.5%로 종영했지만 당시에는 히트작가들이 쓴 작품 치고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작품으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초반 범죄 스릴러를 본격적으로 그려나가다 반응이 좋지 않자 중반 이후부터 인물들 간의 멜로가 부각된 건 이 드라마가 가진 한계였다. 2011년 김은희 작가가 쓴 SBS <싸인>이 살벌한 연쇄살인범들을 등장시켜 지상파에서도 범죄스릴러가 가능하다는 걸 확인시켰고, 이후 이 작품으로 주목받는 김은희 작가는 <유령>, <쓰리데이즈> 같은 작품을 거쳐 tvN <시그널> 같은 범죄 스릴러의 명작을 내놨다. tvN과 OCN 같은 케이블 채널은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본격화시켜준 토양을 제공했다. 지상파에서는 다루기 힘들었던 잔혹한 수위의 범죄들이 다뤄졌고 점점 시청자들에게 익숙하게 되면서 이 흐름은 지상파로까지 이어졌다. <시그널>에 이어 <갑동이>, <보이스>, <터널>, <나쁜녀석들> 같은 케이블 채널의 범죄스릴러가 수위를 높이면서, MBC <검법남녀>, <나쁜 형사>, SBS <리턴> 같은 지상파 범죄스릴러도 등장하게 된 것. 

 

이러한 흐름 위에서 최근 넷플릭스, 왓챠 같은 플랫폼을 통해 더 강력한 해외의 범죄스릴러들이 소개되면서 이제는 19금을 표방하는 우리네 작품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보다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작품들은 단지 자극만이 아니라 깊이나 메시지까지 담게 됐다. <마우스>는 뇌 이식이라는 장치를 활용해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 가해자들을 어떻게 처벌하고 단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고, <괴물>은 한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실종 살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진짜 괴물이 어떤 욕망에서 탄생하는가를 들여다봤다. <모범택시>는 다분히 오락적인 작품이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끌고 와 ‘사적 복수 판타지’를 더해 넣는 방식으로 법이 정의를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최근 범죄스릴러의 폭증은 우리네 장르물의 진화와 더불어, 최근 우리 사회가 마주한 정의에 대한 갈증이 만나면서 생겨난 결과다. 

 

교양 속으로 들어온 범죄

범죄는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tvN <알쓸범잡(알아두면 쓸데없는 범죄 잡학사전)>은 대표적이다. tvN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스핀오프로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잡학 중에서도 ‘범죄’를 주 소재로 가져왔다. 이 아이디어는 다분히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특집으로 구성해 박지선 교수부터 이수정 교수, 권일용 프로파일러 등이 출연해 다양한 실제 범죄 이야기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기 때문이다. <알쓸범잡>은 여기 출연했던 박지선 교수는 물론이고 정재민 법무심의관과 물리학 박사 김상욱 교수 그리고 윤종신과 장항준 감독으로 출연진이 꾸려졌다. 이 프로그램이 말해주는 건 범죄가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이나 유영철처럼 세상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희대의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가습기 살균제나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이나 제주 4.3사건 같은 역사적 사건들 역시 법정기록이나 판결문으로 다시 보는 흥미로운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알쓸범잡>이 이처럼 범죄라는 특정 소재를 가져와 여행과 토크쇼가 더해진 형식으로 풀어내는 프로그램이라면,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는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음모론’을 소재로 가져와 다양한 추론들을 더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다루고 있다. 정규 편성되어 첫 방송된 10년 전 벌어진 강남경찰서 강력반 막내 형사의 사망사건의 경우, 단순 음모론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당시 제대로 수사되지 않고 종결처리된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와 재수사 촉구까지 나간 내용을 담았다. 너무 많은 의혹에도 서둘러 자살 처리한 데 앞장섰던 인물이 2018년 버닝썬 사건에 다시 등장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또 다른 유사사건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 바로 이러한 정당한 의혹을 제기한다는 지점은 <당신이 혹하는 사이>가 단지 음모론을 재생산하는 프로그램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교양프로그램에서도 범죄가 주요 소재로 자리하게 된 건, 최근 갈수록 잔혹해지는 범죄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정인이 사건’은 물론이고 ‘N번방 사건’, ‘노원구 일가족 살인사건’ 등등 충격적인 범죄들이 매일 같이 사회면을 채우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드라마가 이들 사건들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에 반해, 후회나 죄책감조차 없이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허구를 통해서나마 단죄하는 카타르시스를 전한다면, 교양 프로그램들은 그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함으로써 이를 예방하거나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를 들여다보려 한다.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우리가 처한 불안한 사회를 TV는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글:시사저널, 사진: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