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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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세상

이보영의 사이다에 전혜진의 위로 한 스푼이 더해지니

D.H.Jung 2023. 2. 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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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사’, 폐허가 된 이보영의 마음, 중요해진 전혜진의 역할

대행사

“아니, 사는 것도 쓴데 먹는 것도 맨날 이렇게 쓰면 무슨 힘으로 버티겠어요?”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에서 조은정(전혜진)이 케이크를 챙겨다주며 하는 그 말에 고아인(이보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고아인의 쓰디쓴 삶은 그의 책상 위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쓴 커피가 늘 놓여 있고, 한쪽에는 머리를 쥐어 짤 때 습관적으로 물고 있었던 담배들이 쌓여 있다. 

 

고아인이라는 캐릭터에서 특이했던 점은 바로 이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습관처럼 물고 일을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피웠다 끊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담배를 물고 있는 행위는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업무의 과중함이 느껴지고 건강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의 성격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느껴지는 건 ‘결핍’이다. 무언가를 습관적으로 입에 물고 있는 건 어쩌면 어려서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엄마의 부재가 만들어낸 심리적 결핍과 불안감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대행사>는 물론 고아인이라는 이 파이터가 태생과 학력, 성별로 차별하는 세상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매 번 위기 속에서도 상대들을 곤욕을 치르게 만들고 실력으로 무너뜨리는 사이다가 가장 큰 매력인 드라마다. 그래서 이렇게 전면에서 치고 나가는 고아인 같은 캐릭터의 서사에 간간이 워킹맘으로서 실력은 있지만 집에서도 은근히 회사를 그만두기를 바라는 압력 앞에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는 조은정 같은 캐릭터의 서사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6회에 드러난 조은정의 존재감은 <대행사>가 그리려는 것이 고아인이라는 인물의 전쟁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고아인이 저 차별하는 세상과 맞짱을 뜨며 보여주는 사이다가 <대행사>의 한 축이라면, 조은정이 일로 성공하고픈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이와 가족을 챙기느라 그게 쉽지만은 현실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다. 

 

어찌 보면 고아인도 조은정도 삶의 균형을 잡고 있기 보다는 극과 극으로 나가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인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이 가족 따위는 아예 없는 존재이고, 개인적인 삶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과 어우러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적인 연애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드라마에서 그 이야기 들어주는 친구도 없다. 가족도, 동료도, 친구도, 애인도 없는 말 그대로 모든 관계에서 ‘고아’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오로지 자신 스스로만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조은정은 정반대로 자신 스스로의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회사에서는 카피라이터로 괜찮은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워킹맘이고, 집에 돌아가면 회사 그만 두라는 철없는 아들과 은근히 애들 금방 자란다며 아이를 챙기길 바라는 시어머니, 남편 앞에서 답답하기만 한 며느리, 엄마다. 

 

하지만 이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가는 고아인과 조은정이 서로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긴다. 조은정이 포기하고 사직서를 내려던 순간, 고아인이 그를 CP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 것. 조은정은 사직서를 찢어 버리고, 집에는 아이에게 사직서를 냈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집을 나와 출근하는 길이 너무나 즐거워진다. 그만큼 이 인물은 고아인과 달리 낙천적이고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인물이다. 

 

고아인도 조은정도 쓰디쓴 삶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된다. 치열하게 싸워 쟁취하려는 고아인이라면, 주어진 상황이 어려워도 수긍하고 받아들이며 즐겁게 버텨나가는 조은정이다. 이 둘의 조합은 그래서 <대행사>를 흥미롭게 만든다. 싸워야 쟁취할 수 있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싸우다 자신을 고갈시키는 ‘상처뿐인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보통 일터에서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인물을 위로해주고 지지해주는 요소로 멜로가 등장하곤 하지만, <대행사>는 그런 클리셰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초반만 하더라도 게임회사 대표인 정재훈(이기우)과 혹여나 멜로적 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관계는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정재훈이 고아인에 대한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고아인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고아인 주변에는 다른 지지자들이 서 있다.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 포차를 하고 있는 과거 고아인의 사수였던 유정석(장현성)이 그렇고, 같은 팀에서 늘 든든하게 고아인을 업무적으로 챙겨온 한병수(이창훈) 부장이 그렇다. 하지만 유정석과 한병수가 업무적인 지지를 해주는조력자들이라면 조은정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업무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폐허된 고아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고아인의 사이다 가득한 전쟁과 더불어 조은정의 따뜻한 위로 한 스푼이 있어 <대행사>의 서사가 균형 있는 재미를 더하게 됐다.(사진: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