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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세상

‘바빌론’,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살아있을 거라는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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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 ‘바빌론’이 100년 전 할리우드를 추억한 건

바빌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말을 태워 옮기는 트럭이 멈춰서고 운전수가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에게 트럭을 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매니는 말이 아니라 코끼리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화를 내던 운전수는 그러나 뒤편에 서 있는 진짜 코끼리를 보며 깜짝 놀란다. 절대 안된다는 운전수에게 매니는 할리우드 인사들이 벌이는 파티로 코끼리를 옮기려 하는 것이고, 그걸 해주면 파티에도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운전수는 기꺼이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길에서 코끼리를 태운 트럭을 거대한 똥 세례까지 받아가며 매니와 운전수가 오르는 기상천외하면서도 코믹한 광경이 펼쳐진다.

 

데미안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의 이 도입부는 그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 편의 기발한 은유처럼 그려진다. 도대체 어떤 파티길래 코끼리까지 등장할까 궁금하지만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재즈음악이 가득한 그 곳은 한 마디로 광란과 난장의 끝판이다. 마약과 섹스에 취해 반나로 춤을 추며 갈수록 혼돈 그 자체가 되어가는 그 난장은 자극의 끝판이다. 그러니 코끼리가 등장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곳은 돈과 화려함으로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들, 제작자들, 감독들, 배우들이 모여 코끼리처럼 매혹적으로 시선을 끌지만 똥 세례를 싸대는 코끼리 같은 엉망진창의 대혼돈이 뒤섞여 있다. 

 

엉망진창이지만 유혹적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 공간이지만 완전한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보이는 환각 파티 현장은 바로 데미안 셔젤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을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허공으로 붕 떠있는 듯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실제로 혼몽해진 이들이 인파들 위에 올려져 옮겨지며, 뒤섞여 혼음을 펼치는 모습은, 파티 다음 날 보여지는 영화 촬영장의 난장과 기막힌 댓구를 이룬다. 환각 파티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전쟁통이 따로 없는 영화 촬영장이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난장판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인물들이 눈에 띤다. 전날 파티장에 대뜸 찾아와 스스로를 ‘타고난 스타’라 말하며 그 혼돈 속에서도 시선을 잡아 끌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파티 때문에 펑크 낸 배우 대신 창녀 역할을 맡아 단박에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파티장에서 넬리 라로이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매니는 넬리에게 영화판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성영화의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때문에 영화 촬영장에 우연히 왔다가 기회를 잡는다. 잭 콘래드는 술과 마약에 쩔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감독의 ‘액션’ 소리에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영화 촬영장은 대 혼돈 속이지만 그 안에는 이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데미안 셔젤 감독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조악하고 나아가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영화의 현장들은 다름 아닌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다. 녹음기술이 들어가 있지 않아 하나하나 자막을 찍어 인서트 컷으로 넣었던 시대의 풍경이다. 잭 콘래드는 그 무성영화 시대 영화가 탄생시킨 스타다. 대사를 할 필요가 없고,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극장의 관객들을 환호하게 했던 시대. 당시 영화는 기차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어 보여줘도 경탄의 박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넬리 라로이 역시 이런 시대의 끝자락에 기회를 잡아 벼락스타가 된다. 저 환각의 파티에서 누가 더 과감한 행동과 춤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주목을 받게 되는 것처럼, 넬리 라로이는 타고난 끼로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에 탄생한 스타의 성장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시 정점에 올랐던 스타가 유성영화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 현장을 그저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영화가 되고, 그것이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던 무성영화 시대는, 목소리와 현장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아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 놓여있던 가림막이 한 꺼풀 벗겨진다. 잭 콘래드는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영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들을 목격하고, 가식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것으로 무성영화 시대에 벼락스타가 됐던 넬리 라로이는 이제 말도 안 되는 불어까지 구사해가며 자신을 포장해야 상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그 끝은 우리가 이미 영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비극이다. 한 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들은 그 빛을 지나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왜 하필이면 지금 데이먼 셔젤 감독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건 다시 현재 영화가 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아름다운 도발이 아닐 수 없다. OTT가 생겨나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이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은 분명 영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시대다.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스타와 감독과 제작자들이 탄생할 테지만,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밀려난 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할리우드를 찾았다가 우연히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매니를 통해 전한다. 

 

시대는 계속 바뀐다. 그건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2023년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뀐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시대를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만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변화된 시대를 맞아 어느 날 갑자기 비웃음을 사는 위치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 스타들만의 이야기랴. 보통 사람들 역시 한 때를 구가하지만 시대 변화 속에서 기성세대로 구세대로 밀려나지 않던가. 그래서 할리우드 가십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스마트 진)이 혹평을 한 일에 화가 난 잭을 위로하는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만큼은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시대가 바뀌어도 그 시대를 만들었던 이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 또다시 맞이하게 된 영화의 변화의 시대에 대해 100년 전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과거의 시대는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되지만, 그 안에도 빛나는 열정들이 있었고 그것은 당대의 영화라는 기록을 통해 후대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 무려 세 시간짜리 영화지만 극장에서 봐야 진짜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데이먼 셔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사진:영화'바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