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1박2일’과 ‘우결’, 왜 둘 다 보면 안 돼?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1박2일’과 ‘우결’, 왜 둘 다 보면 안 돼?

D.H.Jung 2008. 9. 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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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된 TV 프로그램, 그 생존법과 한계

지금처럼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경쟁이 치열했던 적이 있을까. 월화수목의 드라마 전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고, 주말의 예능 전쟁은 그 판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중 드라마, 주말 예능’ 같은 틀조차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 월요일 밤의 예능 전쟁과 주말 드라마 경쟁은 점점 전 요일로 확산되면서 전방위적인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대전을 예고하고 있다.

소재나 완성도에서 평준화된 TV
그런데 경쟁구도를 벗어나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이 가을의 TV를 바라보면 우위를 따질 수 있기보다는 각각의 개성들이 강하고,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답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에덴의 동쪽’이 대작으로서의 완성도 높은 시대극을 그리고, ‘타짜’는 부동의 소재인 허영만 원작을 각색했으며,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포스와 클래식소재라는 개성이 강하다. 반면 ‘바람의 나라’는 ‘주몽’과는 또 다른 고민하는 왕을 그릴 새로운 고구려 사극이며,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퓨전사극을 기대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드라마들은 소재나 완성도면에서 어느 것의 우위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것은 이미 여러 차례의 진화 단계를 거치며 다양해진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어떤 계보를 형성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프로그램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를 거듭해왔다. ‘무한도전’에서 비롯된 여행 컨셉트가 ‘1박2일’의 야생을 거쳐, ‘패밀리가 떴다’의 심리게임으로 이어졌고,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와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종교배되면서 등장한 ‘우리 결혼했어요’의 연애모드는 거꾸로 ‘무한도전’과 ‘패밀리가 떴다’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동시간대 경쟁하지만 모두 각각 한번씩은 수위에 올랐던 적이 있을 만큼 각각의 완성도를 구축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치열해진 편성전쟁과 새로움에 대한 강박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이제 TV의 드라마와 예능은 선뜻 부동의 우위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 완성도나 소재면에서 승패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움이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마다 벌어지는 편성전쟁이나, 하루에 2회분을 방영하거나 스페셜을 앞뒤로 배치하는 등의 변칙 편성이 일반화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예능에 있어서 치열해진 건 시간대 경쟁이다.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는 각각 ‘해피선데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요일이 좋다’라는 프로그램 속에 존재하면서 다양한 시간대 공략으로 시청률에 영향을 주었다. 초반 ‘1박2일’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같은 시간대를 피하기 위한 전략을 썼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이 약화되는 느낌을 보이자 ‘우리 결혼했어요’는 ‘1박2일’과 같은 시간대로 이동해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편성 전쟁만큼 치열해진 건,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다. 드라마에서 이제는 단순한 멜로나 트렌디가 통하지 않는 건 그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올 가을 드라마 대전이 볼만한 것은 거의 모든 드라마들이 소재면에서나 스타일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의 상황은 더 절실하다. 기본적인 리얼 버라이어티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정착되고 또 성공한 코드들이 곧바로 다른 프로그램에 소비되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생명력은 그만큼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는 새로움이 추가되면 그 자체로 전세는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패밀리가 떴다’가 성공한 것은 ‘1박2일’에 없던 새로움 (예를 들면 여성 출연자라거나 심리게임 같은)에 기댄 바가 크다. ‘우리 결혼했어요’가 새로운 멤버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 시청자들에게 좋기만 할까
물론 시청률 경쟁은 어떤 면에서는 시청자들에게 반가운 상황이다. 그만큼 질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 아니면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은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방영시간이 조정되는 상황이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한 프로그램에서 봤던 성공한 소재들이 여기저기서 똑같이 베껴지는 상황 역시 시청자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이것은 끝없이 새로운 소재나 스타일을 발굴해낸 그 원본의 아우라를 무한복제를 통해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대 경쟁은 지금 시대에 얼마나 유용한 것일까. 하드웨어의 변화가 곧바로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작금의 디지털화된 방송환경의 변화에도 시청 패턴의 변화는 아직까지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시간대를 무너뜨린 디지털 환경에서 동시간대의 시청률 경쟁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그 변화의 속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화된 IPTV와 HDTV의 보급은 이 변화를 이끄는 주동력이다. 이 하드웨어의 변화가 말해주는 건 이제 경쟁의 시각보다는 다양성의 시각으로 프로그램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나라’, 그리고 ‘바람의 화원’을, 그리고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중 하나를 선택하게 강요받길 원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모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